그와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냥 친구로 지내는 게 어떠니..?"
엄마 친구 아들이랑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엄마가 보인 반응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나도 친구랑 사돈이 된다고 상상하면 반가우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동시에 들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마가 만나라고 주선해준 것도 아니었고, 그냥 엄마 친구 아들이 같은 회사에 다닌다고 말해준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만난 것은 순전히 우리의 의지였다.
내 나이 다섯 살쯤이었을까, 엄마 고등학교 친구들의 아들, 딸들이 모여 혜화역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우리는 구면이었던 것이다. 어렸을 적 엄마친구모임의 자식들까지 종종 만나서 함께 뛰어놀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의 존재를 전혀 몰랐고, 엄마가 친구의 아들, 딸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았다.
회사에서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우리는 마주칠 때마다 간단한 인사를 하며 지나쳤다. 부서가 달라서 일로써 엮일 일도 전혀 없었다. 나는 회사에서 항상 지쳐있었다.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안타깝게도 슬럼프가 시작된 이후였기 때문에 일의 즐거움은 다 날아가고 일의 힘듦만 남아있던 상태였다. 그는 회사에서 항상 밝아 보였다. 인사성이 밝았고, 긍정적이었고, 일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회사에서 스웨덴에 있는 본사 투어 프로그램에 보낼 직원을 뽑는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진귀한 기회였다. 지원하기 위해 몇 가지 과제가 있었고, 회사의 문화와 가치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인지 증명해야 했다. 나는 이미 회사의 문화와 가치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단계였기 때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밝고 힘찬 걸음걸이로 다니던 그는 회사의 문화와 가치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몇 안 되는 참여자로 선발되었다는 공지가 올라왔을 때 나는 그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가 광명에 있는 지점으로 옮긴다는 소식을 전했다. 집이 너무 멀어서 편도 2시간에 3번 환승이라는 어마어마한 노력을 들여 출퇴근을 하던 와중, 가까운 광명점에 자리가 나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무언가 아쉬웠지만 "오히려 잘됐네요."라는 말 밖에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마침 나도 단기 프로젝트로 1달여간 광명점으로 출근을 할 기회가 생겼는데 광명점 출근 첫날, 출근도장을 찍다가 그를 만났다.
"아, 저 프로젝트 때문에 잠깐 광명점으로 출근해요."
"오 정말요? 그럼 끝나기 전에 밥 한번 먹어요!"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 8시부터 밝은 그의 에너지가 전해졌다. 그저 안면 있는 사람한테 하는 인사치레 같은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엄마 친구 아들이라고 하니 더욱이 밥 한번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그를 초밥집에서 만나기로 한 날, 그는 두 다리 달린 아디다스 로고가 보드를 타고 있는 일러스트가 빼곡히 반복된 흰색 카라티를 입고 나타났다. 소위 얼스룩(earth look)이라고 하는 채도 낮은 자연의 색감에 편하고 자유분방한 히피 느낌의 천 쪼가리가 펄럭이는 옷들에 꽂혀있던 나는 원색에 기괴한 캐릭터가 반복적으로 그려진 옷에 적잖이 당황했다. 한창 트렌드에 민감한 디자인 업계에서 일하며, 외모는 바꿀 수 없지만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도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첫인상으로 사람들의 취향과 성향을 유추하곤 했는데, 이 스타일은 내 좁은 스펙트럼 밖의 생소한 것이라 약간의 경계심도 있던 것 같다. 물론 소개팅 자리도 아니고, 중요한 자리도 아니기에 차림이 무슨 문제냐 싶지만 그 옷은 나에게 적잖이 큰 인상을 심어주었다. 밥 먹고 간 카페에서 나온 하트 모양 빨대가 너무 귀엽다며 호들갑 떠는 그의 해맑은 미소와 오버랩되면서 그 옷은 그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솔직함을 대변하는 아이템이었다.
사회화 교육을 받아오면서 기쁨과 행복, 열정, 분노, 우울 등의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일에 익숙해진 나는 생각해보니 오래전에 이미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매 순간 일어나는 감정을 모조리 표출해서는 안 되었다. 수업시간에 친구와 장난을 치면 벌을 섰고, 복도에서 뛰어놀면 혼이 났다. 옷이 더럽혀지면 남들에게 보기 안 좋으니 복장을 단정히 해야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고, 정해진 과목 이외에는 관심을 쏟으면 안 되었다. 체육 과목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디자인과에 들어간다고 입시미술학원에 들어가니 정형화된 그림을 찍어내기 바빴다. 합격하는 그림에는 정답이 있었다. 한 가지 정답만을 원하는 교육 시스템을 받아들이며 나는 성인이 되었다. 나는 어쩌면 조금 튀어도 당당할 수 있는 용기와 해맑은 솔직함을 동경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와 사귀기 전 썸이 무르익던 어느 날, 동갑인 나에게 도통 말을 놓지 않는 그에게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물었다.
"아.. 말을 놓기 시작하면 너무 편해질 것 같아서.. 말 놓는 게 편하면 놓아도 돼요!"
나중에 더 물어보니 부모님들께서 존댓말을 쓰시는데 서로 존중하는 느낌이 들어 좋다고 했고, 말을 놓는 것은 그냥 허물없는 친구처럼 대하는 기분이라 놓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말을 놓는 것부터가 친밀함의 표현이었는데, 그럼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소홀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니 존댓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는 꾸준히 나에게 존댓말을 쓰고, 나는 반말에 익숙한 사람이라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쓰는데 친구들이 신기해하며 묻는다.
"오, 둘이 존댓말로 말해?", "남편은 존댓말 하는데 너는 반말해?ㅋㅋ"(뜨끔)
엄마한테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넌지시 내비쳤을 때, 엄마는 결혼 상대에 대한 우려를 넌지시 내비쳤다. 예상컨대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만날 때마다 하는 자식 자랑, 자식 걱정들을 들으니 실제로는 만나보지 않은 그에 대한 편견이 엄마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소위 대한민국 남자라면 갖춰야 하는 결단력과 책임감, 어느 정도의 고집 이런 것들이 부모님께서 본 그에게는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강단 있고 엄격한 한국의 아버지였고, 그의 형 또한 결단력과 고집이 어느 정도 있는 대한민국의 아들이었다. 그 안에서 그는 딸 같은 역할을 자연스레 택했고, 그렇기에 가족들과 굉장히 원만한 관계를 이룰 수 있었지만 어쩌면 부모님의 시선에서는 우려스러운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 엄마에게 굳어져버린 이미지와, 그리 높지 않은 위상의 대학교, 현재 회사에서의 직위, 월급은 사윗감으로써 망설여지는 이유처럼 보였다.
실제로 만난 그는 전혀 달랐다. 상황에 따라 결단력과 고집이 적절히 발휘되었고, 그의 친화력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적당한 리액션을 취할 줄 알았으며, 공감을 잘하면서도 친구들과 서로 짓궂은 장난을 칠 때도 전혀 밉지 않게 돌려 까는 신기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고, 사람들을 만나길 좋아해서 하루에도 두, 세 개씩 약속이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 가장 많다고 생각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었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했다.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서 읽었던 인간관계가 원활한 유형의 사람이 바로 그인 것 같았다. 나는 주관이 워낙 뚜렷해서 사람들과, 특히 가족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많은데,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내 생각을 원활하게 표현하는 법에 대해 항상 고민하던 찰나라 그가 가진 능력이 부러웠다. 그는 나의 뚜렷한 주관이 부럽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부족한 빈 공간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데이트할 때도 나의 의견에 대부분 따라주는 편이었다. 나는 평소에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아서 내일은 여길 가보자 하면 너무 좋다며 가는 길과 주변 맛집 등을 검색해주었다. 환경 관련 전시나 채식 맛집, 멋진 자연 속 명소 리스트를 하나씩 꺼내 보일 때마다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해 주었다. 관심분야가 아니었던 새로운 것을 체험할 때 보이는 그의 적극적인 호기심은 상대방을 몇 배로 더 신나게 해주는 그의 매력이었다.
인생의 꿈을 이야기할 때에도 그와 나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려낸 미래에 대한 그림이 꽤나 뚜렷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자연 속에서, 아늑한 흙집을 짓고 직접 기른 채소로 맛있는 음식을 해 먹는 삶을 상상했다. 버려진 동물들과 다양한 식물들이 모여 안심할 수 있는 장소가 나의 터전이었으면 했다. 도시에서의 삶은 내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끌려다니는 듯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을 하든 일단 무조건 시골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꿈은 자식의 초등학교 체육대회에 참여해 달리기 1등을 하는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그리는 미래는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든든한 아빠의 모습이었다. 그에게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면 무슨 일을 하든 상관이 없었다. 그의 꿈에는 가족이 있었고, 나의 꿈에는 개인적인 취향이 묻어있었다.
그와 미래를 함께하기로 결정하고부터, 우리는 우리의 꿈에 대해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그림에는 자연 속 동식물들과 더불어 가족들과 다른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그려 넣었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가 나에게 미친 영향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또한 가치 있는 시간임을, 여러 사람들이 모였을 때만 만들어낼 수 있는 시너지를 그는 나에게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었다.
그의 그림에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모습 뒤로 멋진 자연 풍경과 아늑한 집이 그려졌다. 안정적인 회사에 다니며 편안한 신축 아파트를 얻어 사는 삶 이외에는 생각해본 적 없는 그가 나와 함께 여행 다니며 시골에서의 삶도 한 가지 가능성으로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의 기준에 끼워 맞춘 인생이 아닌, 우리가 정말 우리다워질 수 있는 인생을 시골에서 그려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서로의 꿈이 자연스레 각자의 꿈에 녹아들어 우리는 어느새 같은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