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식물, 국가를 선언하다> - 스테파노 만쿠소
이탈리아의 생물학자 스테파노 만쿠소는 책 <식물, 국가를 선언하다>에서 식물을 보는 우리의 관점을 뒤틀어버렸다. 식물은 살아 있는 모든 종의 대부분을 대표한다는 사실, 지구를 형성하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식물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방법으로 식물을 국가의 일부로 다루었다. 이런 새로운 관점에 이끌려 이 책을 빌려보게 되었다.
약 30만 년에 이르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생명체의 역사에 비하면(약 38억 년) 매우 짧은 순간임에도, 우리는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지구의 많은 부분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이에 대한 저자의 비유가 재미있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모른 채 그것을 가지고 놀다가 엉겁결에 큰 사고를 일으키는 것처럼 행동한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한다. 인간이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식물이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 종의 생존에 필요한 안내서를 들고 우리를 다시 구해내려 한달음에 달려오는 상상 말이다."
아마도 이게 맞는 말인 것 같다. 우리는 땅 속 세계와 식물들이 네트워크 하는 방식에 대해 상당 부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개미의 사회, 벌의 사회, 메뚜기, 사마귀, 여치, 거미, 진딧물의 사회를 모른다. 매화나무, 명자나무, 보리수나무, 감나무가 어떻게 풍파를 버티며 함께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마음껏 베어내고, 땅을 파헤치고, 약을 쳐서 벌레를 쫓아내고, 콘크리트로 매립하는 큰 실수를 반복하는 게 아닐지.
이를 알리기 위해 저자는 식물국가의 헌법 조항을 만들었다. 저자가 오랜 기간 연구해 온 식물 공동체의 성격을 우리 인간이 알아듣기 쉬운 법의 언어로 써놓은 점이 흥미로웠다.
어떤 종의 우월성을 얼마나 오랜 역사동안 생존하였는지로 계산해 본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하위권이다. 은행나무는 아마도 2억 5천만 년 전부터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종의 지속성이 우리의 목표였다면, 인간은 매일매일의 선택에 있어 눈앞의 욕망이 우선시 되는 현재 같은 행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부터 '지혜로운 사람'을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용어는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존하는 다른 모든 종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종에 대한 무지와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오만이다. 높은 수준의 사회를 구축하는 다른 생물들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다른 생물종과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공생하는 법을 깨우쳤다. 우리는 대체 어떤 생각으로, 지구라는 유한한 자원을 무한히도 사용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식물에게는 이러한 문제들이 없다는 것이다. 식물의 성장은 자원의 가용성을 고려하기만 하면 된다. 식물계는 사용 가능한 자원량에 따라 가능한 한 성장하는 단순한 규칙을 따른다. 자원이 부족해지면 식물 성장은 감소한다는 의미다. 자원이 제한된 환경에서 무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미친 생각은 인간만 할 뿐이다.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생명체는 현실적 패턴을 따른다.
제6조 '생명체의 미래 세대를 위해 대체 불가능한 자원 소비는 금지한다.' 중에서 (p.136)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Earth overshoot day)'이라는 개념을 듣고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니 그 날짜가 올해 2023년에는 8월 2일이라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8월 2일까지 우리가 소비한 자원의 양과 배출된 오염은 지구가 재생 가능한 수준인데, 그 이후부터는 미래 세대의 자원을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돈은 빌려다 쓰고 똥은 축적시킨다. 식물은 이용가능한 자원만 사용한다. 성장을 멈출 때를 안다. 우리는 어떠한가? 눈앞에 닥친 위기를 모르고 계속 소비한다. 성장률이 낮다고 울부짖는다. 대체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우리는 식물국가의 법칙을 따를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숲이 충분하지 않으면 이산화 탄소의 증가 추세를 꺾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없다. 삼림 벌채는 반인륜적 범죄로 취급하고 그에 따른 처벌을 해야 한다. 이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삼림의 무형 자원과 그것을 유지해 주는 생명체, 토양, 공기 그리고 물을 그대로 유지해야 할 의무는 우리 식물국가의 헌법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의 헌법에 들어가야 한다.
제5조 '식물국가는 깨끗한 물, 토양 그리고 대기권을 보장한다.' 중에서 (p.120)
식물만이 우리가 배출한 탄소를 손쉽게 땅에 고정할 능력이 있다. 생각해 보자. 아직 기약 없는 탄소 포집 기술이 개발되었다 쳐도, 그 기술을 사용하는데 내야 할 비용을. 그리고 빈 땅에 식물을 심는데 드는 비용을. 우리는 어쩌면 식물에게 주권을 넘겨주기 싫은 이기적인 마음에 이러한 대안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본능적 욕구에 충실한 어린아이이니까.
'게릴라 가드닝'은 폐허가 된 땅에 허가받지 않고 꽃이나 풀을 심어 가꾸는 전 세계적인 운동을 말한다. 총 대신 꽃을 들고 싸운다는 것이다. 어쩌면 식물국가의 지령을 받은 사람들이 생태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꽃 씨앗을 들고 우리의 땅을 탈환하려는 게 아닐까. 흥미롭고 아름다운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게릴라 가드닝의 사례를 찾아보았다. 한 쓰레기 불법투기 현장에 항상 '쓰레기 투기 금지' 혹은 '불법 투기 시 신고합니다' 등 위협적인 문구가 적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투기는 계속 이루어졌다. 허나 그곳을 깨끗이 치우고 벽에 예쁜 벽화를 그리고, 화분을 놓아 꽃을 심어놓으니 실제 관찰카메라에서 누군가가 불법투기하려고 가져온 쓰레기봉투를 되가져가는 게 아닌가. 이러한 재밌는 운동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도시의 공터와 인도 가장자리, 모든 건물의 옥상 등이 식물로 뒤덮여 있다면 매연 가득한 서울도 조금 더 숨쉬기 좋은 도시가 될 수 있을까?
공생으로 협력한 덕분에 생명체는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달성할 수 없었을 결실 맺는 법을 배웠다. 식물의 세계에서는 함께 살아가는 이러한 예술이 가장 눈부신 완성을 이룰 수 있다.
제8조 '식물국가는 공존과 성장의 도구로 생물의 자연 공동체 간 상호부조를 인정하고 지지한다.' 중에서(p.167)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자연계는 경쟁하고 죽이는 정글이 아니라 협동하고 공생하는 공동체라고 하며 그 사례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경쟁이 자연적 법칙, 본능 같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협동과 연대를 통해 혹독한 지구 환경에 적응해 온 멋진 생명체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자연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우리는 지속가능한 종의 보존을 위해 협동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숲에 가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모기의 습격과 성가신 거미줄, 벌과 뱀의 공포 또한 존재하지만 이는 극복가능한 수준이다. 반면 도시에 가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도시를 구축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도시의 나쁜 대기질과 경쟁적인 분위기는 우리에게 육체적, 정신적 병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큰 병원이 있는 도시에 살아야 하는 모순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몸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동물들은 위험을 감지하는 예민한 시각, 청각, 후각 등의 감각이 발달해 있다. 우리는 오랜 기간 다른 종들을 배척하고 우리끼리 똘똘 뭉쳐 살았기 때문에 수명이 늘긴 했지만,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중대한 질병을 감각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더욱더 파괴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우리를 치유해 주는 자연과 협동하는 법을 배울 때이다. 사고치던 어린아이에서 좀 더 성숙한 청소년기로 넘어갈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