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비욘 나티코 린데블란드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는 17년간 숲 속에서 수행한 스웨덴의 한 승려가 쓴 에세이집이다. 그의 인생 전반을 들여다본 듯, 따뜻하고 다정한 말투로 그의 깊은 경험들을 써 내려간다. 그래서 그런지 내 삶에 풍파가 들이닥치는 듯한 기분이 드는 날이면, 침대 머리맡에 둔 이 책을 들게 되었다. 위로와 깨달음, 평온함을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한 회사의 능력 있는 재무담당자였다. 기회도 많았고, 주변에서 보기에는 그야말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무담당자임에도 주주의 이익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며 밀려드는 업무에 가득한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일순간 그는 성공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러 경험들을 거쳐 그는 태국에서 숲 속의 승려가 되기로 결심한다.
책 속에서는 그가 승려 생활을 하며 겪은 일화들과 그 경험들을 통해 깨달은 삶의 진리들을 이야기해 주는데, 승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는 지혜들이기에 한 구절 한 구절 와닿는 부분들이 많았다. 특히나 불확실한 앞날과 암울한 미래에 대한 예측들을 보며 불안의 구름다리를 건너고 있는 듯한 요즘의 나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책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알고 싶고,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주를 보거나 세세한 계획을 세우고 그에 집착하듯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 또한 계획형 인간이기 때문에 내가 정한 목표와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끊임없이 정신을 집중한다.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깊게 고민한다. 그러다 보니 지칠 때가 많다. 타인이 볼 때는 혼자 있는 것 같지만 내 머릿속의 생각들과 대화하느라 하루가 다 가버릴 때도 있다.
미래는 어차피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이다. 회사에 다닐 때도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다.
'계속 이렇게 무의미한 굴레에서 사는 것이 맞나?'
월급을 모으고, 서울에 아파트를 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안정적인 삶이라고 하는 모든 것은 남들이 정한 기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인생의 목적과는 완전히 달랐다. 회사를 위해 하는 일은 내 인생의 목표와 관련이 없었고, 매연 가득한 서울에 아파트를 사는 것과 개미굴 같은 곳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때마침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이 생기면서, 소비를 촉진하는 대량생산 도매 시스템에서 일하는 것이 더더욱 의미가 없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느끼는 공허함과 삶을 낭비하는 것 같은 불안과 늙어서 느낄 후회를 생각하니,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뿌리 깊은 환경문제에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자연 속에서 사는 삶을 일구고 싶었다. 주류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기에 매 순간 위기에 봉착하고 불확실하며 불안한 길을 걸을 테지만, 똑같이 불안한 인생이라면 나는 후자의 삶을 택하기로 했다. 인생에서 맞닥뜨릴 위기에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중심을 잃지 않기를 다짐했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맨 땅에 삽질을 하여 짓는 건물처럼 모든 것은 느렸고 인내와 지구력을 요구했다. 특히나 가까운 사람들이 내가 정한 길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나는 일일이 설명을 해야 했다. 외로움을 잘 타지 않고, 대체로 누군가의 공감이 없어도 내 신념을 잘 유지한다고 생각했던 나이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다는 두려움은 존재했다. 미래를 통제하고 싶어 하던 나에게 저자는 말을 걸었다.
어떻게 하면 삶이 펼쳐지는 데 잘 대응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미래의 계획과 통제와 조직에 덜 신경 쓰고 현재에 더 충실하면 됩니다. 완전한 몰입에 빠졌을 때의 기분을 아실 겁니다. 순간에 몰입할 줄 아는 사람은 닥치지도 않은 온갖 일에 대응할 방법을 궁리하면서, 혹시나 잘못될지도 모를 상황을 미리 숙고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갈지를 끊임없이 걱정하지도 않지요.
p.185 중
미래를 통제하려 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정말 단순한 말이지만 참 어렵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내가 원하는 미래에 대한 생각(또는 걱정)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억지로 피하기 힘든 것이었다.
저자는 또 말했다. 영적 성장의 결정적인 도약은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는 데서 이루어진다고. 주어지는 상황에 적응하는 것. 이것은 사실 지구 생명체의 진화의 법칙이기도 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적당히 흔들리고, 몰아치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떠다닐 줄 아는 연습은 오히려 그 어떤 풍파에도 잘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의 진가는 후반부에 있었다. 저자는 루게릭 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써내었다. 젊은 나이에 삶이 끝날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죽음이라는 것은 사실 일상적으로 감각하기 힘든 일이다. 과거에는 가족들이 죽거나 하면 마을에서 직접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땅에 묻는다. 눈으로 목격하는 죽음은 나 또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살게 된다. 저자가 지냈던 사원 옆에는 화장터가 있었기에 죽음을 늘상 접하며 지냈다.
저는 가끔 불길 옆에서 타오르는 시신을 밤새 바라보았습니다. 며칠 전까지 숨 쉬고 움직이던 삶의 흔적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아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제 안에서 쉼 없이 들썩이던 뭔가가 차분해졌습니다. 불안하던 마음도 살며시 가라앉았습니다. 뜨거운 불길을 바라보면서 내면의 불길을 식힐 수 있었습니다. 머리로 죽음에 대해 성찰했다기보다는 마치 제 육신이 진실을 보고 알아차린 것 같았습니다.
p. 263 중
그런 과정을 통해 저자는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의 순간을 인정하고 그전까지 펼쳐질 삶의 순간을 더 의미 있게 만들고자 하는 일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나 또한 죽음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산다는 것과 연결된다. 죽음의 순간에 삶을 되돌아보게 될 텐데, 그때 내 인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잘 살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을 위해서 사는 삶은 의미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회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삶은 어느 날 갑자기 끝날 겁니다. 그 삶을 어떻게 선택하고 살아왔는지가 더욱 중요해지는 순간입니다.
(중략)
우리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그리고 내일은 그보다 더 많이.
(중략)
열 살 정도만 돼도 내면의 아름다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 설명할 수 있을 테지요.
인내심, 관대함, 정직함, 당당함, 용서하는 능력,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 공감, 경청, 연민, 이해심, 사려 깊음...
p.272-273 중
사회에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을 때, 이것이 단순히 남일 같지는 않았다. 우리 또한 언젠가 외로운 독거노인이 될 수 있고, 아이가 딸린 이혼남녀가 될 수 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두려웠던 어린아이 시절이 있었다. 전세사기로 빚더미에 앉을 수도, 일터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자살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폭우와 산불로 인해 살고 있던 터전을 잃을 수도 있다. 혹은 소중한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을 가까이서 들어보면 도저히 남일이라고 무시할 수 없다.
자연은 더 심각하다. 우리의 욕심으로 산을 밀고 하천과 바다를 매립함으로 인해 순식간에 터전을 잃어버리는 동물들의 좌절감을 인간인 우리는 전혀 헤아리지 못한다.
이들의 편에 서서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저자가 말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때때로 이기적이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 그 마음을 멀리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인간과 그리고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때 우리는 더욱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기후위기 앞에서 인류의 존속에 대한 위기까지 눈앞에 닥친 현시대에, 이 위기를 극복하는 법은 탐욕을 버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 때, 자연도 우주도 우리의 편에 설 것이다.
존재는 공명합니다. 우주는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이면에 있는 의도에 반응합니다. 우리가 내보낸 것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세상은 세상 그 자체의 모습으로서 존재하지 않지요. 세상은 우리의 모습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p.275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