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ho Aug 25. 2024

돌봄

두려운 이들을 향한 치유의 편지


저는 언젠가부터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이 불편합니다. 장애인들이 보이는 거리보다 장애인들이 보이지 않는 거리가 더 불편합니다. 우울증으로 인한 청년 자살률이 1위라고 하는데, 그들의 아픔이 조명받지도 못하고 잊혀지는 것이 불편합니다.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엇나가는 아이들이 불편합니다. 한강에서 사라진 새들과 보이지 않는 벌들, 잠자리, 나비들이 불편합니다. 의미도 없이 갯벌을 매립한다며 물길을 막고, 그로인해 말라 죽어버린 조개들이 불편합니다.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대다수의 존재는 약자가 되었습니다. 성과를 내려다가 심신을 돌보지 못해 지쳐버린 저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죠. 저의 몸과 마음이 아파하는 소리를 듣지 않다가 병이 나버렸어요. 결국 저는 성과를 내기를 포기하고 몸과 마음을 돌보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어쩌면 타자는 저와 실패를 연결지을지도 모릅니다. 내면을 채운 만족과 성취는 보이지 않을테지요. 여전히 ‘불안’한 순간들은 존재합니다. 저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때로는 무척 피곤하지요. 전처럼 누군가 시키는 일만 하고 싶은 안일한 생각이 삐져나오다가도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깨어납니다.


하지만 퇴사 전에 제가 가지고 있던 ‘불안’은 조금 달랐습니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살아야하나,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일하고, 회사 매출을 올리기 위해 일하고, 상사가 원하는 것만을 해주는 노동 기계의 삶에서 제가 가졌던 공허함은 이대로는 삶을 지속하기 힘들 것 같은 ‘불안’이었어요. 돌보지 못한 저의 몸은 점점 상해가고, 주위 사람들에게 날카로워졌습니다. 가족들을 조금 더 살뜰히 챙기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어요.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져서 대인기피증이 생기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으니까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인데, 제 삶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대담 자리에서 누군가가 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나로서 온전히 존재하기 힘든 사회’라고요. 철학자 알랭 에레베르는 말했습니다.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성과 사회에서 정의하는 성과란 자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본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개인의 고통과 착취 구조는 당연스럽게 지워집니다. 대형 온라인 쇼핑몰들이 새벽배송으로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쓰러져 간 성실한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대다수는 새벽배송의 성과를 이루기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은 보지 못하고, 새벽배송의 편리함에 열광하고 말지요. 반대로 제가 추구하고자 했던 성취는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와 연결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는 무거운 질문을 던져놓고 시작했던 것은 아닙니다. 환경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집 주위에 높은 담을 쌓고 고립되어서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삶은 어찌보면 좋아보일지도 몰라요. 사실 일상에서 대화를 해보면 모든 이가 그런 삶을 지향하며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지속가능한 행복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저서 '두 번째 산'에서 개인적 성과를 추구하던 첫 번째 산을 넘어 함께하는 삶,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두 번째 산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보았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모르는 이에게 받았던 작은 도움, 혹은 어려운 사람을 보았을 때 큰 용기를 내어 건냈던 손길에서 느꼈던 뿌듯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를 삶의 보람과 충만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속가능한 행복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에서 비로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배려가 있을 때 혹은 내가 사회에서 하는 선택들이 다른 존재들에게 끼칠 환경적 영향을 고민할 때, 저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안전하고 깨끗한 터전이 보존될 수 있다는 연결을 보았지요. 


누군가가 경제 성장을 위해 성과 중심의 사회를 지향하기를 택했다면 그는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뒤쳐지는 수많은 존재들을 끌어안을 준비가 되어있을까요, 아니 적어도 자신의 몸과 마음이 고통으로 소리치고 있지는 않을까요? 성과를 지향하는 사회적 근간 위에 세워진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 속에는 여전히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부재합니다. 저 또한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벗어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끔찍한 노동의 굴레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기 위해 일확천금을 꿈꾸고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처럼요. 안타깝지만 사회에 뿌리박힌 문제를 보려하지 않으며 그저 회피하는 삶은 절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는 삶은 내 몸과 마음을 먼저 돌볼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농사를 짓고, 현미채식을 지향하면서 몸이 상당히 좋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운동량을 점점 늘리면서 체력이 좋아졌습니다. 체력이 좋아지니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매연 가득한 서울 번화가에 가는 것조차 싫어했는데, 사람들을 만나러 서울에 갑니다. 가족들한테 병원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곳에 살기보다는 몸이 건강해지는 곳에서 살아보자고 이야기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농사를 지을 때, 풀냄새를 맡고 땅을 만지고 벌레소리를 들으면서 치유되는 저의 몸입니다. 자연의 네트워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만날 때, 이 곳에서 살아감에 새삼 감사해졌습니다. 제가 농작물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연이 나라는 미약한 존재를 끌어안아주었습니다. 공허했던 마음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었고, 흉흉한 뉴스를 보며 힘들고 지칠 때마다 찾아가면 그 곳에 어김없이 있어주었습니다. 알록달록한 꽃과 과실의 색감, 꽃과 풀의 향기, 바람에 스치는 풀의 소리, 새와 두꺼비, 메뚜기가 뛰어다니는 소리는 도심에서 한껏 곤두세우던 신경을 안정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밭 동료들에게 몸과 마음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경쟁사회, 성과사회,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삽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이 나를 해코지하면 어쩌나 하는 경계심이 더 커졌습니다. 사회적 돌봄이 장기간 부재한 사람들은 엇나가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서로 돌보고 돌봄받으며, 그리고 함께 한다는 느낌만으로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갈 힘이 생깁니다. 각자도생의 사회는 야생입니다. 야생은 죽고 죽임의 전쟁이며, 약자는 도태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이면에 나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인가요? 전세계적 기후위기라는 인류 역사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문제를 앞두고 있지만 우리는 이러한 큰 문제를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로 정말 작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바로 옆사람을 돌보는 우리의 손길, 그리고 내 마음을 돌보는 나의 손길. 모두가 힘들테지만 그래도, 한번 더 돌아보고 한번 더 손을 내밀어봅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작가의 이전글 실패하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