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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May 08. 2023

기억의 소멸이 가당키나 한가

의미로 넘실댈 테니, 살아보고 싶을 수밖에

 모든 것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사진앨범에 꽤나 빈번히 등장했던 그곳이 놀이공원이었었다는건 기억 속에서 존재할 뿐이었지만, 언덕을 오르는 길목에 있던 팔각정만은 소멸하지 않고 홀로 기억을 붙잡듯 남아있었다. 개구진 표정을 한 채로 팔각정 위에서 빼꼼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사진 속의 아이는 다시 돌아와 그곳을 올려보고 있었다. 3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서 살아가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여전히 여기에 있노라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여도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듯, 그렇게 기억의 유품처럼 남아버린 팔각정을 올려다보았다.


 기억의 한 중간에 서서 그때의 나는 행복하였던가 불행하였던가 더듬으며, 해처럼 맑은 얼굴을 한 나는 왜 그리도 일찍이나 살아간다는 것이 슬픔을 참아야 하는, 견뎌야 하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야 했는지, 그래서 그리 살아온 30년이라는 시간의 사이는 지금 어떤 의미가 되었던가 묻고 물었다. 물음에 대한 단 하나의 단서라도 발견하고 싶었을까, 어린 기억이 길어올리는 시간의 조각들은 심연에 가라앉아있는 무언가를 흔들어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라져 버린 것들과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쌓아 올려진 것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소멸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들에 대한 못다 한 이야기들에 대해서, 사진 속의 아이가 던진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걷고, 걸었다.



 모든 것이 소멸해서 없어진다는 건 거짓말 같이 느껴졌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라는 것은 한 생이 소멸할 때까지 지속되는 보장된 불멸의 그 무엇이었다. '기억하겠다' 또는 '기억하지 않겠다'라는 의지는 무용한 다짐에 불과하고, 기억은 마음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각인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지우려 하면 지울 수 있다 그리 애쓰며 살았다. 때때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트리거를 피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분주하게 만드는데 열중하여도, 기억해야 할 것들은 나를 놓아주는 법이 없었다. 기억의 여부는 인간의 의지와는 별개였다. 기억에 대한 주권을 쥘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만이었다.


 삶의 상처에 나를 내어주고,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되어 버린 것들이 내어놓은 길을 살아가는 삶에서 삶의 의지를 무엇으로 찾아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던 시간이 있었다. 지워내고 싶은, 소멸시키고 싶은 대상에 대해서 무력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은 억누름이 아닌, 외면이 아닌 상처의 잔해로부터 '보존의 의미'를 발굴해내는 것 뿐이었다. 보존의 의미를 발굴하는 것만이 대항할 수 있는 유일이었다. 기어이 기억으로 남고야 말겠다는 그것들이 전하는 말들을 이해해내야만 했다. 그것이 의도적 각색에 불과하다 하여도, 그로 인해 삶이 살아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하여본다. 생이 부여된 것들에게 살아내는 것 이상의 고결한 사명은 없으니 말이다.



 생의 허무함을 재생시키는 마음속에 박혀 있는 기억들을 자주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디도 드러내지 못하고, 스스로도 꺼내지 못했던 시간들에 대하여 종이 위에 빼곡히 그것들을 쏟아부었다. 그러면 글자들이 조용히 울어주었다. 종이 위를 지나는 펜은 지나온 상처에 대해서 말하였고, 그 울음들을 종이는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러고 나면 딱, 그만큼씩 마음속의 어두움이 물러났다.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지는 삶의 때에도, 이대로면 괜찮겠다 싶은 평온한 나날에도 종이 위를 서성거렸다. 그러면 왜곡되지 않은 감정의 알맹이를 만질 수 있었다. 슬픔 속에서 바라보는 아픔과 기쁨 속에서 바라보는 아픔의 모양은 달랐다. 그것은 스스로의 편견을 깨는 일이었다. 스스로의 편견을 깬다는 것은 한 개인의 사고관을 재구성해내는 버거운 일이었지만, 스스로 부여한 통렬한 자각을 경험하고나서는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30년 전의 기억을 따라서 걷는, 어린 발자국이 묻어있는 길 위에서의 발걸음은 주저함이 없었다. 잠자리 채를 어깨에 메고 동네 친구들과 공원을 뛰어다니고, 비가 그친 후 길에 생긴 물웅덩이에서 무지개를 발견했던 곳이었다.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옮겨지는 발걸음을 따라 걷다 보면 기억의 잔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홀로 남아있는 팔각정처럼, 지나가버린 시간을 겪어낸 내가 그 자리에 과거에 머무를 것인지, 새로이 딛고 걸어 나갈 것인지 물었다.


 기억 속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삶의 슬픔의 각도는 꽤나 달라져있었다. 아픔 속에 웅크려있던 그 아이에 대한 위로의 마음을 걷는 시간은 화해를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하얀 공백에 조용하고 선명한 테두리를 가진 검은 울음을 손가락으로 쏟아내며 나는 맑아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하릴없이 끄적이고 있는지도, 구태여 깜박거리는 커서를 바라보며 키보드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려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슬픈 기억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그 길 위의 내가 더 이상 아파 보이지 않는 건 살아낸 나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순수하게, 무력하게 어렸기에 그저 받아들일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여지껏 끌어안고 사는 슬픔의 생채기가 온 마음에 생기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나는 티 없이 맑고 해맑은 웃음을 내보일 수 있었으니 어쩌면 강인했다고 해야 적절할까. 슬픔의 깊이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간 속에 있을 수 있었던 게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늦은, 어쩌면 어설픈 그런 위로를 보내며 유년시절의 길 위를 한참이나 걸었다.



 기억의 소멸이라는게 가당키는 한가. 지난날의 아리도록 서글펐던 시간들을 새로이 보존해야 할 의미로 대체될 수 있도록 부단히, 부단히 써 내려갈 수밖에. 그리하여 이어지는 삶은 새로운 의미로 넘실댈 테니, 살아보고 싶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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