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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May 02. 2023

한라산

그냥이라는 다정한 이유로

무언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겨우 들었을 때, 마음에 여유라는 것이 생긴 그때에 좁은 틈을 비집고 조금의 힘이 새어나와 흘러, 흘러서 도착한 곳은 한라산이었다. 여러 번 갔던 제주에서 한번도 가지 않았던 한라산으로 마음이 향했다. 생각의 공백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한라산 길 위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볼에 맞닿는 바람결을 상상했고,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들의 소리, 부서져 내리는 빛의 조각을 상상했다. 피안과도 같이 느껴지는 그 산속에 오롯이 안겨보고 싶었다.


‘가고 싶다’는 막연하지만 선명한 이유,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무엇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라산에 다녀오면 내게 그다음이 생길 것 같았다. 마치 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의 한 동작 같이, 삶의 다음은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야 살아질 것만 같았다. 그게 소용없는 일이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게 착각이었다 하여도, 그 착각을 딛고 옮겨진 삶의 한걸음에 불과해진다 하여도.


일기장에는 한라산에 대한 이야기들이 채워져 갔다. 눈이 덮인 계절이 좋을지, 녹음을 맘껏 누려볼 수 있는 청명의 계절이 좋을지, 바스락 거리는 겨울의 초입이 좋을지. 그리고 배낭에는 무엇을 넣고 갈지, 길 위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내가 좋아하는 따듯한 커피 한잔을 마시는 상상을 하면서... 그렇게 헤실거리며 한라산의 사계절을 들락거렸다.


어떤 이유들로 가지 못했고 어떤 이유들로 미뤄졌다. 애초의 계획대로 홀로, 불쑥 떠나야겠다고 다짐을 다시 했지만, 어느새 겨울이 갔고 봄은 지나고 있었다. 어떤 이유들로 시간이 주어졌다. 이번에는 어떤 이유로도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이유들이 붙잡아도 이번에는 한라산에 가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가고 싶다'는 충동을 계획해서 실천하는 여행의 시작은 어렵지 않았다. 라일락 꽃 색깔을 닮은 지극히 개인적 취향의 등산화를 한 켤레 샀고, 한라산 탐방 예약을 해두고, 비행기와 숙소를 알아보는 일을 마치고 나서는 두둑이 짐을 챙기고 걸음을 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끝이라는 지점을 향해 한발, 한발 묵묵히 내딛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오래도록 '그냥'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해볼 수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스스로에게 꽤나 너그러운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명확한 이유 앞에서 망설임이 설 자리는 없었고, 해야만 하는 일 앞에서 나의 의사는 상관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모호하고 뭉툭한 이유들로 겹겹이 쌓여진 나의 내밀한 바람이, '그냥'이라는 이유로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을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한라산'에서 들을 수 있을까? 다시금 마음속에 설렘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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