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주혜 Feb 28. 2022

도대체 글을 왜 쓰고 싶을까

우리는 왜 쓰는가.

우리는 왜 읽는가.


이 '왜'의 접점이 맞아떨어져야 쓸 맛, 읽을 맛이 나는 글이 된다.


공개된 곳에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목적이 있는 행위이다. 개인적 감성을 풀어내는 역할만으로도 만족스럽다면 자신만 봐도 되는 곳에 남겨도 될 일이다. 다른 누군가가 읽을 수 있는 플랫폼에 자신의 글을 쓰고 게시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다. 자기 자신이라는 필터를 거친 문장이 나타내는 메시지가 누군가에게 닿기를 소망하면서.


글에는 그 사람의 결이 나있다. 그래서 어떤 이의 글을 읽노라면 그 결을 따라 그 사람이 그려보게 된다. 그 사람의 생각의 결, 시선의 방향,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본다. 결국 글은 그 사람의 반영이다. 글에서 보이듯 글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사람들은 글에 담긴 그 사람의 고유한 진정성을 발견하고 감동하고 가슴에 아로새긴다. 하나의 문장이 가져다주는 감동은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틀게 만들기도 한다.


종종 진정성을 거짓으로 포장한 글에 대해 사람들이 분개하는 이유는 그 진정성에 자기의 마음 한켠을 내어주었던 데에 대한 쓰라림과 속상함 때문이다. 마음의 곁을 내어준 데에 대한 슬픔과 허탈함이다.


그게 책 한 권, 하나의 문장이었다 할지라도...

그래서 글이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나는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



어떤 글을 쓰고자 하는가 라는 질문 이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 쓰는 일 자체가 너무나 즐거울지라도 이 글을 통해 나의 어떤 면을 드러내고자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미 저질러봤던 실수를 다시 반복하게 될까 두려웠다.


내 길이라고 생각하고 걷던 길이 내 길이 아니었던걸 알았을 때의 충격처럼, 나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던 글들이 내가 아닌 게 될까 봐 무척이나 겁이 났다. 또다시 다른 누군가의 '흉내'일까 조바심이 났다. 자기 파악이 첫 번째였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알고 그를 드러내는 글을 쓴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 까도 싶다. 무언가가 되고 싶은 에고의 발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것이 나의 길이니 'Go!'를 외치며 열심히 달려간다면 어쩔 텐가. 어차피 알지도 못하고 갈 길이라는 게 뻔했다.


'이것이 나다'라는 프레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그것을 표현하고 드러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 속에서 이것이 나의 진정성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그 프레임에 자기 자신을 가둘수록 그 틀에 꼭 맞는 사람인양 살아야 하는 삶은 또 얼마나 가혹할까.


고로, 알면서 가면 좋겠지만 알지도 못하고 가야 하는 길인 건가 싶어 져서 맥이 빠지지만 부딪혀보는 경험을 통해서 내가 아닌 것들을 떨궈낼 수 있는 안목과 용기가 생긴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일단 이렇게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면서 내 마음도 다독다독 두들겨지는 위로에 글을 써 내려가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나를 위로하기 위한 글을 쓴다면 나는 계속 위로받아야 할 그 무엇으로 남아있어야 하게 될까 무섭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다지 특별할 이력도 없는 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누가 읽고 싶을까 싶었다.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들이 도대체 왜 읽고 싶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은 나를 꽤 오랫동안 붙들어놓았었다. 이런 고민을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털어놨다. 참 감사하게도 나의 지인들은 자신들이 4명의 독자가 되어줄 테니 글을 써서 올리라고 나를 한껏 응원해주었다. 이곳에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바로 이 4명의 독자들 덕분이다.


'힘빼'


글을 쓸 때 이 말을 스스로에게 자주 한다. 자꾸 힘이 들어갔다. 힘이 들어간 글은 뭔가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브런치라는 세상에서 수려한 글들과 마주했을 때 사실 기가 죽었다. 세상에 이렇게 글을 잘 쓰는 분들이 많다니... 내가 쓴 글을 살짝 째려보며 이 글들을 올릴만한가 쳐다보게 되었다. 다시 숨고 싶어 졌지만 4명의 독자에게 글을 쓰겠노라고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한편 한편씩 글을 쓰고 올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가장 하고 싶었던 말들을 글로 풀어내고 나니, 그다음엔 무엇을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내내 따라다닌다. 그리고 독자의 입장에서 내 글을 바라본다면 내 글을 왜 읽고 싶을까라는 생각도 함께 곁들인다. 결국에는 '나는 글을 왜 쓰려고 하는가' 이 지점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충분히 하였는가가 글의 방향과 지속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글이 던지는 시선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보게 되는 글을 만날 때 참으로 값지다. 내가 바라보지 못한 각도로 삶을 들여다보고 주변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종종 한 편의 글을 읽고 나서 조금 괜찮아진 나를 발견하곤 했다. 이와 같이 글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내면에서 위로와 위안을 얻기를 바라는 게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홀로 글쓰기는 손에서 놓지 않고 내가 계속해오던 일이었다. 그런데 글이 쌓일수록 내 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던 건 나의 실수와 아픔의 경험을 통해 내면의 밝은 빛을 찾아보려 노력했던 시간들의 기록을 그저 나눴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내가 풀어내는 문장의 결을 따라 누군가에게 닿아 조그만 위로가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통해서 이전보다는 조금 괜찮아졌고, 편안해졌고, 삶에 감사하게 되었다. 병적인 우울과 무기력을 겪어내면서 스스로를 일으키는 힘을 내 안에서 찾아보고자 노력했던 그 경험을 통해 나누고 싶었던 주제는 '위로의 나눔'이었다.




나에게 내가 스스로 말해주었던 '괜찮아'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이 너무나 미웠던 나에게 '미안해, 그리고 용서해'라는 말을 하며 화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결국에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해주었어야 했던 나 자신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이 모든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텨내고 살아낸 나에게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이런 글이 쓰고 싶었나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각자의 계절에서 피워낼 삶의 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