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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Mar 16. 2022

당신의 아픔을 희석하지 말아요

때때로 우리는 우리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보다 다른 이의 행복과 불행에 견주어 자신의 감정의 방향을 정하곤 한다. 삶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은 타인의 화려하고 거창해 보이는 삶에 비하면 하찮은 그저 그런 일상으로 치부되기 십상이고, 나의 슬픔과 고통 역시 다른 이들의 거대해 보이는 고통과 비교하여 별것 아닌, 그냥 조금 속상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마음속에 꾹꾹 눌러버리고 만다.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는 중요해지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대부분의 삶의 모습들은 화려하거나 아니면 비참하거나 그 두 가지 카테고리에 속해있다. 너무나 화려해서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것만 같아 보이는 삶,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의 가난, 말도 안 되는 잔인함과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온갖 범죄의 이야기의 당사자가 어느새 나의 행복과 불행의 잣대가 되어버리면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나의 불행이 보잘것없어 보인다.


내가 느끼는 고통은 마음 놓고 슬퍼하기에 너무 별거 아닌 일이 되어 버린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아져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한다.



나의 슬픔을 희석해서 묽게 만들어 버리면 그런대로 버틸만해진다. 이미 희석해버린 여러 슬픔이 한데 모여서 슬픔의 밀도가 빽빽해질 때면 그 감정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 힘들다고, 나 슬프다고 말하면 나약한 사람이라는 그 소리가 두려워 힘들다는 말을 다시 삼켜야 한다. 나에게 너무나 '별 거'인 일이, 다른 이에게 '별 거 아닌' 일이라는 말을 듣는다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감정으로부터 무덤덤해지는 방법을 선택하고, 더 나아가서는 감정 자체를 느끼기를 거부하여 감정선을 스스로 잘라버리기까지 한다. 감정선을 자르는 데에는 감정의 종류까지 선택할 수 없었다.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행복과 기쁨의 선마저도 함께 잘라버렸다. 삶을 버텨내기 위한 방법으로 감정 자체를 느끼기를 거부하는 선택을 했다.


그리하여 슬픔도 행복도 없이 겉으로 맴도는 삶을 그저 살아갔다. 아프지 않은 게 행복이 되어버리는 삶 속으로 자진하여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내가 느낀 그 모든 슬픔과 고통의 감정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슬픔이 올라오지 못하게 꾹꾹 눌러야 하는 삶을 지탱할 뿐이었다. 겉으로 괜찮아 보이는 그 사람의 삶의 기저에는 알아봐 주지 못한, 이해받지 못한, 소리 내지 못한 감정들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 위로 '살아지는' 삶에 대한 슬픔이 켜켜이 쌓여갔다. 상처받기 싫었던... 그래서 감정선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방패를 꺼내 들어야 했던 삶에서, 그 방패마저 들어 올릴 힘이 없는 그날과 어쩔 수 없이 마주하고 나면 마음 바닥에 있던 지난날 나의 곪아 터져 버린 슬픔과 고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나의 슬픔을 희석하기 시작했을 때, 애초의 그 감정들은 여렸고 예민했다. 건들면 너무 아플까 봐 감히 만져볼 엄두도 안 나서 어찌 손 한번 쓰지 못하고 가슴속 깊이깊이 내려두었다. 종종 그 슬픔들이 신호를 보냈었다. 여전히 아프다고, 나 좀 어떻게 해달라고... 그 마음의 소리들을 외면한 채 가슴속 깊은 곳에 나의 아픔들을 쌓는 일에 익숙해져 갔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소리마저도 이젠 들리지가 않았고, 슬픔이 느껴지던 통증도 이제는 매일 달고 사는 성가신 그 무엇처럼 되어버렸다.



처절히 무너져버렸던 그날, 내가 만난 나의 지난날 감정들은 더 이상 여리고 예민하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오래되어 색이 바래버린 바짝 마른나무 토막같이 변해있었다. 건드려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마음속에 이렇게 굳어버린 나무토막들이 가득 차 있었다. 도저히 너무 여려서 건들지도 못할 것 같았던 나의 상처는 이렇게 변해있었다. 도무지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를 감정의 퇴적물들을 바라보며 참으로 허망했다.



그때의 나는 나의 슬픔을 돌봐주었어야 했다.

그때의 나는 나의 슬픔을 희석하지 말았어야 했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오직 나 만은 들어주었어야 했다.






내가 아팠으면 아픈 거 맞다고, 내가 슬펐으면 슬픈 거 맞다고 그렇게 스스로 들어주는 게 왜 그리도 겁이 났었을까. 다른 누가 뭐라 해도 나의 슬픔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막아설 필요는 없었는데 구태여 나는 왜 나의 슬픔을 드러내는 게 두려웠던 걸까.


이 세상에서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그 단 한 사람의 힘이 나에게 절실했던 그때에 왜 나는 스스로 '단 한 사람'이 되어주지 못했을까.



그때에 나의 슬픔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잘 들어줄걸... '그래 너 힘들었구나'라고 실컷 맞장구 쳐줄걸... 실컷 슬퍼하고 제대로 아프게 내버려둘걸... 그렇게 앓고 나면 그 슬픔에 대한 면역력이 생겨서 마음이 더 튼튼해졌을 텐데! 말이다.


남들이 아프고 힘든 거 말고, 내가 아팠으면 아픈 거라고 스스로 말해줬어야 했다. 그 슬픔의 크기가 얼마나 작든 크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그리고 슬퍼해도 된다고, 화내도 된다고, 아프다고 말해도 된다고 말해줄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이 어떻게 느꼈는지'였는데 말이다.

 (나는 오늘도 나에게 사과를 고 있다. 매거진의 이름을 '나에게 보내는 사과편지'로 바꿔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해본다. 진짜 미안해서 그렇다...^^)





이제는 순도 높은 내 감정 한 방울 한 방울을 들여다보려 한다.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너무 진해서 화들짝 놀라더라도 그 맛을 받아들이고 느껴봐야겠다. 너무 쓸 때는 달달한 초코케이크 한입 떠먹고 카페인도 충전하고 당도 충전하듯이, 그렇게 마음 놓고 실컷 맛보다 보면 바짝 마른 나무토막으로 내 마음이 변신하는 대참사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쓰다고 에스프레소에 물과 얼음을 왕창 넣으면 밍숭맹숭해져서 커피인지 보리차인지 헷갈릴 지경이 되어버리듯,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는 알고 살고자 한다. 너무 쓸 때는  달달한 무언가를 옆에 두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나에게 진하게 살다 보면 내 인생 진국이 될까.




(그림 출처 : Sabrina Garrasi의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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