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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Mar 29. 2022

삶이 고통이라고 인정하니 작은 행복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숨은 행복 찾기

'삶은 행복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실제로 나의 삶이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와는 별개로 '삶'이라는 것 자체는 곧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왔다. 완전하게 잘 사는 삶의 모습은 행복이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고통이 삶에 끼어들면 마치 행복으로만 가득 차야할 내 삶이 훼손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 고통들이 상당히 거슬렸으며, 고통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나의 행복을 망쳐버릴까 봐 두려웠었다. 지워내고 싶었다. 나의 삶에 '고통'이라는 요소가 끼어들길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나에게 행복한 삶이란 고통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하는 과정의 연속이 되어버렸다.



삶에서 고통을 완전히 없애는 일이라는 게 가능이나 할까. 없애고 지워내고 털어내 봐도 고통이라는 녀석은 새끼를 까는 것인지 어느새 또 다른 고통이 삶에 들어와 있었다. 끝이 없는 과정이었다. 그래도 나는 삶은 행복한 것이라는 인생의 대전제를 굳게 믿고 살았다.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는 손에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은 행복한 삶이 주어지리라 믿었다.



삶이라는 게 행복 이어야 하는데 행복이 아닌 삶에 놓여있는 나를 바라보는 게 불안하고 이상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그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며 고통을 바로잡기 위해 애를 썼다. 삶의 중간중간 찾아드는 행복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삶에서 행복은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이를 반겨주지 못했다. 그에 반해 작은 고통에 대해서는 과민하게 반응했다. 나의 삶에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그렇게 고통을 바라보았다. 내 삶에서는 고통이란 없어야 한다는 행복에 대한 무결함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고통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빅터프랭클)

"누구에게나 삶은 힘듭니다."(박상미, 마음아 넌 누구니)

"삶이 고통이다."(부처)



요즘 들어 책을 읽을 때 '고통'이라는 단어가 유달리 크게 보였다. '삶이 고통'이라는 말을 책이나 여러 곳에서 읽어봤을 텐데, 고통을 삶의 하나의 요소로만 생각했지 삶이 곧 고통 자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사실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정말 삶이 고통이라면, 고통스러운 삶을 다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누구나 다 힘들게 살아.'

'사는 게 원래 다 힘들지, 너만 힘드냐.'

'다 힘든데 참고 사는 거야.'



누군가에게 힘듦을 토로하면 이와 같은 말이 돌아왔다. 제일 듣기가 싫었다. 왜 힘들어야 하냐고, 왜 행복으로만 채우면 안 되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다들 힘드니까, 사는 게 원래 힘드니까 그냥 나도 참고 살으라는 이 말이 나는 너무나도 싫었다. 그동안, 나는 충분히 많이 고통 속에 놓여져있었다. 그만하고 싶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발버둥 친다한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상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삶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여태껏 내가 생각해온 '삶은 행복' 대신에 '삶은 고통'으로 바꿔야 하는가 나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혹시 내가 잘못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삶이 행복이라고 굳게 믿고 살았던 지난날의 나를 지나서, 이제는 삶이 고통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나를 마주할 자신이 내게는 없었던 걸까. 쉽사리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삶이 행복이어야 한다고, 또는 고통이어야 한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었다. 행복하고 싶은 욕구도,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구도 모두에게 합당하다. '삶은 행복'이라는 전제로부터 '삶은 고통'이라는 전제로 달리 바라보려 하는 이유는 내가 편안하기 위한 그 이상 그 이하의 것도 아니었다.


삶은 계속되고 부산물처럼 고통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오로지 고통만을 겪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고통을 겪어도 괜찮다고, 어쩌면 고통 속에 있는 인간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그렇게 한번 받아들여보자고 스스로에게 제안해보았다.


사는게 고통스러운거라고 받아들여서 내가 좀 더 편안해지면 그걸로 오케이 아닌가.



삶을 고통이라고 바라보면 삶이 더 고통스러워 보일 줄 알았다. 내가 겪은 고통과 슬픔들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냥 살면서 일어나는 그저 그런 일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달리 힘듦을 받아들이고 인정해버리고 나니 작은 행복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나 여기 있어! 나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워내고 싶었던, 너무나 피하고 싶었던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음으로써 내 눈앞에 펼쳐진 소소한 작은 행복들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삶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마치 고통이 주인공으로 살다가 흐릿한 배경으로 물러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고통들의 중요도가 낮아짐과 동시에 나의 관심이 행복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우선, 일상에서 피곤하게 느껴졌던 일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아이를 키우는 일은 나에게는 늘 고되다. 갓난이일 때는 갓난이대로, 아장아장 걷고 기저귀도 못 뗀 아기일 때는 그 나름대로, 이제는 제법 컸다지만 6살의 논리에 맞춰서 바라보고 함께 생각해주어야 하는 일들도 만만치가 않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들지?'라는 생각에서 내내 벗어나질 못했다. 아이가 내게 주는 행복이 당연하게 치부되었고, 아이를 키움으로써 드는 수고로움은 매일매일 자라나듯 커 보였다.


'아... 정말 너무 힘들다.'라는 생각이 올라오자 원래 그런거라고 달리 생각해보자는 시도를 해봤다. '아이 키우는 게 당연히 힘들지!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인가!'라고 속으로 말하니, 묘하게도 아이가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그냥 그러려니 하는 일들로 달리 보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변덕과 내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달라며 떼를 쓰며 엉엉 우는 아이를 보는데, 6살에게는 이리도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에 저렇게 진심으로 온몸으로 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짜증보다는 아이의 순수함이 귀엽게 보였다. 신기했다.


남편과 캔맥주를 마실 때는 마개를 따기 전 입구를 휴지로 닦아주는 남편의 작은 행동이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고 고맙게 느껴졌다. 늘 나에게 해준 남편의 작은 배려였는데, 이것 또한 당연히 그가 그래야하는 그 무엇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아이를 씻기고 양치질까지 도맡아 해 주는 게 우리 부부가 함께 나눈 육아의 분담이지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이를 돌봐주는 남편의 자상함이 더 이상 당연한 부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행복의 숨은 그림 찾기가 시작된 것만 같았다.






행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때 상대가 내게 베풀어주는 작은 성의와 감사가 당연하게 느껴졌었다. 누군가가 내어주는 어여쁜 마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너무나 가볍게 지나쳐버렸었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지 않았던 귀한 행복을 얼마나 놓치고 살았을까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숙연해진다.



세상에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것은 없었다.



삶은 행복으로 나아가는 고통스러운 여정이었다. 고통스럽기에 그 길을 함께하는 이들과 나눌 이야기가 생기고 추억도 생긴다.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기에 서로 의지하고 도울 수도 있다.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경험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고통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얻기도 한다. 또한 고통이 내게 말하려는 것을 통해서 잠시 삶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고통과 행복 중 결국에는 무엇이 고통으로 남을지, 행복으로 남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일희일비해야할 필요도 없으며, 고통과 행복을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삶이 고통일지라도 이 삶이 나아가는 방향은 언제나 '행복'이다. 나의 행복을 넘어 가족의 행복, 친구들의 행복, 모두의 행복을 향해 삶은 진전된다. 삶이 행복이어야만 한다는 나의 전제가 어느 부분에서 오류가 있었는지 발견했다. 고통이어도 괜찮다. 우리 모두 그렇게 더불어 고통 속에 살아간다. 그러기에 고통이 나있는 길옆에 나란히 나있는 행복의 길도 걸을 수 있나 보다.


행복의 길만 걸으려 했던 삶에서 고통의 길도 걸어보려 한다. 그 길이 고통의 길이었다가, 행복의 길이었다가 하는 반복 속에서 삶의 '행복'이라는 목적지로 갈 테니, 지금 걷는 이 길이 곧 '행복의 길'이지 싶다.



P.S

봄이 오니 길가에서 예쁜 꽃을 팔더라구요. 늘 지나치기만 했는데, 저를 위해 꽃 한단 선물해봅니다. 그냥 노란 후리지아가 아니라, 노란 빛깔의 행복으로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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