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주혜 Apr 24. 2022

나는 죽지 않기로 다짐했다

안 태어났으면 어쩔뻔했을까

엄마는 어린 나를 끌어안고 말했다.


"너를 안 낳았으면 어쩔뻔했을까. 다들 너를 낳지 말라고 했는데 너를 안 낳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


이 말을 내게 했던 그날은 엄마가 많이 울었던 날이었다. 어린것이 보낸 위로에 엄마가 답한 이 말은 내게 위로를 필요하게 들었다.


나는 이 말이 마치 태생이 거부된 아이가 바로 나였다는 말처럼 들렸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홀로 바닥에 앉아 울고 있으면 휴지를 가지고가 엄마의 눈물을 말없이 닦아주곤 했다. 엄마에게 울지 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엄마에겐 울어야 할 일들이 많아 보였고 어린 내가 보기에도 '울만한 일'들로 보였기에, 내가 슬플 때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울음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그저 엄마가 눈물을 닦을 수 있는 휴지를 말없이 건네는 게 그 당시 나의 최선이었다.


살가운 딸의 말없는 위로에 고마웠던 엄마가 던진 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엄마가 나를 낳아서 참 다행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린 나는 '모두 너를 낳지 말라고 했는데...'라는 말만 머릿속에서 뇌였다.


그러고서는 '나는 태어나지 말았아야 했나'라는 생각이 곧이어 따라왔다.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사람인데 억지로 태어나서 이렇게 엄마가 힘들고 우리 가족이 불행한 삶을 살게 된 것인지 뭔지 모를 불안과 죄책감이 들었다.


실제로 어렸을 때 나는 우리 가족의 불행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서른셋이 되던 해에 책을 읽다가 자신이 느끼는 대표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질문을 만났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도 대표가 있싶어서 호기심에  찬찬히 내가 주로 느끼는 감정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고단함, 불안, 두려움, 초조함... 내가 주로 느끼는 감정들이었다. 내가 이런 감정들 속에서 매일을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 중 넘버원을 뽑아야 하는데 각각의 감정들이 막상막하로 느껴져서 고심하는 나를 발견하고서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이런 고심 끝에 선정된 나의 대표 감정은 바로 '불안'이었다.



나는 왜 늘 불안할까.



아무 일이 없어도 올라오는 이 불안의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너무나 이 불안감이 내게 익숙해서 내가 불안을 느끼고 사는지도 몰랐다.


이 불안의 시작을 알고 싶었다. 왜 나는 언제나 불안감을 삶의 배경으로 하여 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어른들이 내게 했던 말들이 하나둘씩 튀어 오르듯 생각이 났다.






나에게는 바로 한 살 위 언니가 있다. 엄마가 언니를 낳고 몸이 아파 갓난아기를 두 달 가까이 키울 수가 없어서 고모들이 언니를 키워야 했다고 한다. 그런 엄마가 몸이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둘째를 임신했다고 하니 고모들은 아이를 지우라고 했단다. 연년생으로 낳아 키우기가 힘드니 첫째를 어느 정도 키우고 약간 터울을 두고 다시 아이는 가지면 된면서.


엄마는 시댁 식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를 낳기로 결심하고 둘째 딸을 얻었다. 그 당시에는 태아의 성별을 산부인과에서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첫째도 딸인데 둘째도 딸이라는 소식에 친할머니는 그러게 낳지 말는데 굳이 낳아서 또 딸을 낳았냐며 방금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고생했다는 말 대신 핀잔을 주었다고 했다. 만약 그 당시에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었다면 지금 나는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기 때 사진을 보면 나는 까무잡잡하고 머리숱도 엄청 많아서 전형적인 아기들이 가진 귀여움이 없어 보였다. 그에 반해 새하얀 피부에 갈색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가진 언니는 아빠의 사랑을 받았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고 한 달이 지나도 아빠가 언니가 태어났을 때와는 다르게 나의 이름지어줄 생각을 안 해서 엄마가 적당히 첫째 딸의 이름과 '라임'이 맞는 이름으로 지어 나를 세상에 등시켰다.



나는 아빠에게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어릴 때 내가 위로받은 것은 '아빠는 언니를 좋아하고, 엄마는 나를 좋아하니깐 괜찮아.'였다. 아빠의 반복되는 외도로 고통을 토로하는 엄마에게 고모들은 이렇게 말했다.



"둘째가 아들이었어봐. 지아비가 바람을 피웠겠어?? 집에 와도 재미가 없으니 남자가 밖으로 돌지."



나는 이 말을 라이브로 현장에서 들었다. 아주 똑똑히. 지금 이렇게 쌍따옴표 붙여가며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을 수 있을 만큼. 이건 어른이 아이에게 가하는 언어적 폭력이었다. 는 어렸기에 그저 이 언어적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이 폭력은 나에게 '넌 잘못 태어났다'라는 자아상의 상흔을 남겼다.


아빠가 바람을 피우는 이유가 내가 딸이라서 는데, 그때의 어린 나는 고모들이 던지는 얼토당토않은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을 필터 없이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도 태어났다면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 태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태생이 거부당한 느낌은 깊게 내게 뿌리 박혀 있었다. 이것이 나의 불안의 원인이었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다.

어떻게 어린 조카를 눈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심리를 공부하며 알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이혼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나 역시 그랬다. 내가 괜히 태어나서, 남자가 아니라서 엄마 아빠가 헤어진 것일까. 정말 내가 남자아이였다면 아빠가 바람도 안 피우고 나를 예뻐해 줬을까. 여러 번 물었지만 되돌아오는 건 쪼그라진 어린 마음뿐이었다.



어렸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칭찬은 '야무지다'였다. 야무지게 알아서 척척척. 이 행동의 근원은 어른들에게 '잘 보이고'싶어서였다. 나는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잘못된 게 아니라, 태어나도 됐을 아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어른들의 칭찬은 나를 기쁘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칭찬을 받고 나면 불안의 수위가 낮아짐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다시금 차오르는 불안의 수위는 바람직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낮춰주어야 했고,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다. 더욱 슬펐던 것은 잘 보여야 하는 대상이 어렸을 때는 '어른들'에 한정되었다면,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 대상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거부당하고 싶지 않았다. 

마땅히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그래서 인정받고 싶었고, 결국에는 사랑받는 존재로서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욕구는 좀처럼 채워지지가 않았다.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었다. 이것은 나의 불안을 잠재우는 방법이었다. 외면적으로 나는 성실하고 싹싹하고 힘든 일도 군말 없이 잘 해내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삶의 고통이 반복될 때면... 어쩌면 고모들의 말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살지 말았어야 할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내게 우울이 꽤나 오래전부터 함께 했으며 언제든 내가 결심만 하면 이 삶을 스스로 끝맺을 수 있다 여기며 버티듯 살았다.


이런 목숨을 담보로 한 호기로움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이전만큼 담대해지지 못고, 어린 아들을 보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데 삶을 걸어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고 싶지 않았지만, 살아야 할 이유를 나는 찾아내야만 했다. 삶의 공허함이 지속되는 나날들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선택을 하게 될지 몹시도 겁이 났기 때문이다. 



나의 삶의 공허함을 메울 수 있는 의미를 찾고 싶었다. 환영받지 못한 생명일지라도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의미가 있다고 나를 스스로 설득하고 싶었다. 살아도 된다는 간절한 허락을 구하고 싶었다. 마음 놓고 살아도 된다고, 그렇게 확인받고 싶어 애쓰며 살았다.



살고 싶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마음 놓고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해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 허락을 구해야 함을 느꼈다. 그래서 나 스스로를 치유하고 돌보고자 심리상담을 배우기 시작했다. 타인을 상담하기 위함이 아닌 내가 나를 상담하기 위해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배우는 '로고테라피'를 만나게 된 것이다.


스스로를 돌보고 상담하며 나는 결심하게 되었다. 내 삶을 스스로 끝맺는 선택을 하나의 옵션으로 두고 살기를 그만두기로. 절대로 나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절대 스스로 죽지 않기로 결심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생명은 없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었다. 내가 살아야겠다고 하여 생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그러하듯 나는 살아야 할 필요에 의해 살려지는 존재였다. 이 삶과 생명을 내 것이라 움켜쥐며 살았던 지날 나의 무지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나를 살리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 존재함을 깨닫자 나의 목숨이 누군가가 태어나도 되고 안되고를 논할 수 조차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느 누가 무엇이라 말했어도 난 태어났어야 할 사람이었던 거다.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으니 말이다. 차츰 지난날 내가 가진 삶에 대한 오해가 풀려갔다. 나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을 가진 소중한 존재들이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조차도 이를 살뜰히 챙겨 보살피는  힘의 원리가 깃들어 있다. 하물며 사람도 이만하지 못하겠느냐 라는 생각은 나의 삶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주고 지지를 보내주었다.


어느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다. 살아있다면 마음껏 살아도 되는 거였다. 구태여 허락을 구할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나는 태어났어야 할, 아주 잘 태어난 인간이다.'



이 말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 되자 마음의 배경처럼 머물러 있던 불안이라는 녀석이 옅어짐을 느꼈다. 나의 삶의 공허함은 삶의 충만함을 경험해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내면의 공허함은 외적인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더 이상 외적인 소음과도 같은 소리들과 자극에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오로지, 진실로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사는 삶 속에서 삶의 충만함은 어느새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됨을 배우게 된 것이다.






불안이 머무르다 간 자리에 나에 대한 존중과 배려, 자기 사랑을 데려다 놓게 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진짜 안 태어났으면 어쩔 뻔했어!'


언제 삶이 끝나도 아쉽지 않을 것 같던 내가,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해지고 싶어졌다. 삶에 대한 애정이 생겨났다. 잘 살아보고 싶다.


삶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매거진의 이전글 교회 아줌마를 용서하기로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