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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Sep 11. 2022

지나친 기대는 금물

6살짜리 아이가 조금만 더 오래 몰라주었으면 했다. 아직은 어려서 마냥 해맑을 수 있는 그런 나이인 아들을 보면서 내가 위안을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는 빨리 자라고 있었다. 내가 아이의 해맑음에 기대어 잠시 덮어두듯 묻어놓은 아픔의 마음속 상자가 열려버렸다.


짧게는 2주, 길게는 3주 만에 아이와 1박 2일을 함께 보낸다. 오랜만에 만나기에 그동안 보고 싶었던 마음과 평소에 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특별한 무언가를 해주어야 할 것 같지만, 아이가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평상시와 최대한 비슷한 일상을 보내주라는 조언에 따라 다소 심심한 1박 2일을 보내곤 했다.


헤어질 때마다 마음이 아린 건 나아질 수가 없다. 이런저런 말로 둘러대며 아이를 아빠에게 보낼 때 아이는 늘 헤어지기 싫다고 말하며 온몸으로 안긴다. 엄마도 그렇다고...  엄마도 정말 너무 헤어지기 싫다고... 그렇게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엄마도 그렇다고 말하면 그다음에 이어질 질문들에 대해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아직 연습도 못해봤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아이와 떨어져 지냈던 시간이 있었다. 아이는 떨어져 살았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당시 4살이었던 아이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한 나의 착각이자 소망이었던 것이다.


아이는 구체적으로 내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왜 엄마는 퇴근하고 아빠가 있는 집으로 오면 안 되는지, 그전에 우리 가족이 함께 살던 집은 이제 다시 갈 수 없는 것인지, 왜 엄마는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지,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왜 아빠가 있는 집에는 들어가지 않느냐고 묻는 아이의 질문에 이제 얼마 후면 통하지 않을 빈약한 논리를 들이대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해주었다.


아이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만 5년도 살지 않은 어린 인생에게는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범주의 그 무엇이었다. 이해되지 않지만 납득도 되지 않는 엄마의 말에 아이는 어리기에 더 이상 질문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제는 아이에게 상황에 대한 설명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몰라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가장 크게 상처받을 사람은 아이이니까. 아이가 조금이라도 나중에 알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그 마음의 한편에는 그로 인해 나 역시 조금만 더 기대어서 덜 아팠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이도 힘들고, 나도 힘든데... 도대체 이혼을 결정한 이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던가 되묻게 된다. 힘든 상황들 중에서 덜 괴로운 선택지를 고른 것일 뿐일까. 슬픔에 대한 보상은 무엇일까.


잠에서 덜 깬듯한 아이가 말을 걸었다.


"엄마,  꿈꿨어. 엄마랑 아빠랑 우리 옛날 집에서 놀았어."

"뭐하고 놀았는데?"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우리가 다 같이 놀았어."


이제는 다시 그럴 수가 없어서 정말 꿈에서 밖에 펼쳐질 수 있는 그런 장면이 되어버렸다. 아이가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아이에겐 그때가 행복했던 기억이라는 걸 나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았기에 수도 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지 않은가... 그래서 몇 년을 참고 참은 것 아닌가... 미련스러울 만큼 참아서 그리 심하게 앓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자고 스스로 다독여도 마음이 아픈 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런 종류의 슬픔 앞에서는 무력해져 버리고야 만다.



삶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의 나를 이미 몇 번이고 경험했다. 그리고 그 경험 속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다.


무엇이라도 괜찮으니 일단 음식을 먹을 것.

짧아도 괜찮으니 몸을 움직일 것.


그래서 뭐라도 먹고 움직이려 노력하며 요즘을 지내고 있다. 포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또다시 무기력에 휩싸이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아이에게 잘 설명해주려면 그래서 그게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이해를 구할 수 있으려면 살아내야 하니까 애를 써보고 있다. 감당해내야 할 슬픔이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매일매일 아이가 그립고 그립다. 일단, 살아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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