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저 거기 있었을 뿐

죽은 자들의 독백

by 천재손금

1.

나는 그냥, 벽 뒤에 서 있었다.
향초를 하나 샀는데, 아직 포장도 안 뜯었다.
오늘 당직만 무사히 넘기면, 룸메 없이 조용한 저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놈이 달려오더니
내 귀를 스치고, 그다음 순간—
목이 꺾였다.
딱, 하고. 나뭇가지 부러지듯이.
숨이 끊기기 직전, 향초 이름이 떠올랐다.
‘평화로운 아침.’

나는, 정말… 그냥 벽 뒤에 서 있었을 뿐이다.
(존 윅)

2.

나는 그냥, 여자친구의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오늘 끝나고 뭐 먹을래?’
사소한 질문 하나에 괜히 웃음이 났다.
“네가 먹고 싶은 거,” 타이핑을 다 하고
보내자마자,

총성이 울렸다.
가슴께가 벌겋게 물들었다.
폰을 떨어뜨리며 마지막으로 본 건
그녀의 답장 알림이었다.
‘그럼 우리—’

그녀의 대답은… 뭐였을까.

나는, 그냥 좋아하는 사람의 문자를 읽고 있었을 뿐이다.
(007 카지노 로얄)

3.

나는 그냥, 계단 위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만 무사히 넘기면, 진짜 그만두려고 했다.
입사 5년째, 매일 같은 자리.
나를 히어로라 믿는 아이에게,
거짓말 그만하고 싶었다.

그러던 그때,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칼날이 번뜩였고,
목이 찔렸다.
손을 올렸지만, 피가 먼저 쏟아졌다.

나는, 그냥 계단 위에 서 있었을 뿐이다.
(킹스맨)



우리는 죽었다.
이름도, 대사도 없이.
그저 ‘그의 동선’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살아남았고, 우리는 잊혔다.

사람들은 우리가 따르던 보스를 ‘악당’이라 부른다.
하지만 내 입장은 다르다.
그는 내게 돈을 줬고,
나는 그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나에게 특별히 나쁜 짓을 시키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가 내 삶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나는 죽었다.
누구의 이름도, 어떤 이야기도 남기지 못한 채.

우리를 향한 카메라는 한 번도 줌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도, 살아 있었다.
사랑했고,
돌아갈 곳이 있었고,
평범한 하루를 바랐다.

그 순간, 그 자리에
그냥… 거기 있었을 뿐이었다.

누가 나를 기억해 줄까.
잠깐 스쳐 간 화면 너머에도,
끝내 말하지 못한 삶들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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