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엘리트 딸의 어버이날

by 다현

나는 엄마를 버리고 지금은 해체한 1세대 아이돌 그룹 H.O.T.(점은 두 개가 아니라 꼭 세 개를 붙여야 한다.)를 택하는 막심한 불효를 저지른 적이 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며 전국 각지의 자녀들이 효심을 뽐내는 어버이날이었다.


우리집에서 '김다현의 어버이날 불효 사건'이라고 회자되는 이 이야기는 20여 년 전 중학교 하복 브랜드를 결정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대 초중반을 전후로 교복을 구입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엘리트, 스마트, 아이비클럽 등 교복 판매 업체들의 치열했던 아이돌 모델 경쟁을 말이다. 우리 지역에선 입학 후 반을 배정받은 아이들이 서로의 교복 브랜드를 확인하고 상대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정탐하는 풍경을 쉽게 마주할 정도였으니, 그 시절 오빠들 밖에 몰랐던 10대 빠순이들에게 교복 브랜드는 자신의 덕질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봐도 무방했다.

R658x0.q70.jpeg 교복에 레게머리 실화...?

우리 H.O.T. 오빠들은 당시 엘리트의 모델을 맡고 있었다. 엘리트에서 교복을 사면 오빠들의 얼굴이 박힌 쇼핑백은 물론이거니와 다이어리, 브로마이드 등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나 같은 빠순이가 놓칠 리 만무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불거졌다. 내가 입을 하복의 실질적 구매자인 엄마가 '엘리트'가 아닌 '스마트' 맹신자였던 것이다. 엄마의 주장에 따르면 엘리트는 스마트에 비해 원단이 후지고 사이즈가 작은 반면, 스마트는 고급 원단을 사용하며 사이즈가 좀 더 넉넉하다. 이런 근거로 스마트 교복을 사는 게 합리적인 소비라는 판단을 끝낸 엄마는 동복은 내 고집으로 엘리트에서 구매했지만 하복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음을 재차 강조했다. "스마트? 스마트라니? 스마트는 god가 모델이란 말이야!"


여기서 잠시 1~1.5세대 아이돌 배경지식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god는 우리 H.O.T. 오빠들이 해체한 뒤 그 빈자리를 꿰찬 5인조 아이돌 그룹으로, 영원한 club H.O.T.(팬클럽 명)가 되겠노라 피의 맹세를 한 나에게 곱게 보이려야 보일 수 없었다. 솔직한 말로 스마트 교복을 입느니 그냥 벗고 다니는 게 나았다. 그때는 정말 이렇게 생각했다.


엘리트 매장으로 들어가자는 나의 고집에 반해 엄마는 뚝심 있게 스마트 매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죽상을 한 내 얼굴을 보며 점원으로부터 건네받은 교복을 입어보라 권했다.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엄마의 사회적 체면을 고려해 피팅까진 어떻게 해보려 했지만 다른 아이돌도 아닌 god가 모델인 브랜드의 교복을 입는 건 우리 오빠들을 배신하는 행위 같았다. "안 입어! 안 입는다고! 지오디 싫단 말이야!" 결국 나는 옷을 반쯤 걸친 채 울음을 터뜨렸고 이런 나를 보며 웃지 않으려 애쓰는 점원을 뒤로 한 채 매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돈은 이것저것 사 먹고 남은 오백 원. 엄마랑 택시 타고 집에 갈 생각에 버스비까지 탈탈 털어서 대왕핫도그랑 슬러시를 사 먹는 게 아니었는데... 결국 난 '엉엉' 울며 1시간 남짓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거실에는 먼저 도착한 엄마가 앉아 있었다. 잔뜩 화가 나 보였지만 나 역시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기에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변이 휑뎅그렁했다. 벽에 붙어 있던 오빠들의 브로마이드와 책장에 꽂혀 있던 잡지, 녹화 테이프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침대 위엔 god 멤버들이 활짝 웃고 있는 스마트 쇼핑백이 놓여있었다. "엄마!!!"

2522734A5938E80E26.jpeg 요즘은 유튜브에서 보는 것들

박스에 넣어 다 갖다 버렸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 물건들은 보통의 테이프와 잡지와 앨범이 아니었다. 한 빠순이의 다년간의 애정과 노력이 깃든 일종의 '덕심 결정체'였다. 나는 엄마를 향해 어떻게 그걸 버리냐며 소리를 빽 지르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탔다. 혹시 다른 빠순이가 주워가는 건 아닐까 하는 급한 마음에 다리보다 머리가 앞선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하지만 도착한 쓰레기장에선 나의 애정과 노력이 깃든 덕심 결정체를 찾을 수 없었다. 방송 시간 놓칠 새라 밤낮으로 텔레비전 앞에 대기하며 녹화한 VHS 테이프 여러 개와 코 묻은 돈(결국은 부모님 돈)으로 산 앨범들과, 잔뜩 모아 놓은 잡지들이 그렇게 사라진 순간이었다.


아파트 쓰레기장 이곳저곳을 기웃대고 뒤적이며 또 '엉엉' 울다가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박스 하나가 놓여있었다. 애타게 찾던 덕심 결정체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냥 버리고 가면서 에쵸티는 버리면 그 난리야?" 엄마는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침대 위에 놓인 쇼핑백이 엘리트였다면 더없이 완벽한 엔딩이었을텐데... 결국 난 중학교 3년 내내 스마트 하복을 입어야 했다. 입기 전엔 죽기보다 싫었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왜냐면 영원한 팬으로 남겠다며 피의 맹세를 한 내가 이듬해 탈덕하고 '신화'로 갈아탔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덕심 결정체도 여기저기 내다 팔고 제 손으로 갖다 버렸다. '빠심'은 변하는 거야...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내가 저지른 불효는 사골처럼 우려진다. 매년 돌아오는 어버이날에 용돈을 손에 쥐어드리면 엄마는 "에쵸티 그 원숭이 같은 애들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너도 참!"이라는 말로 그날을 회상한다. 그러면 나도 "그러게, 교복 그게 뭐라고 그 난리를 피웠는지 몰라." 하고 맞장구를 치며 머쓱하게 웃는다. 우리집만의 어버이날 루틴이다. 엄마랑 아빠는 언제까지 H.O.T. 사골을 우리실까. 내 자식을 낳으면 그만 두실까. 아마도 이번 생에 자식 낳기는 요원해 보이니 어버이날 불효 사건을 경신할 만한 새로운 불효를 저질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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