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재학 시절, 당시 하늘처럼 높으신 인생 대선배처럼 느껴졌던 고학번 선배들은(그래봤자 대여섯 학번 위) 동아리 분기 행사나 연말 사은회 등에 간헐적으로 등장해 피가 되고 살이 되는(것 같았던) 인생 교훈들을 들려주었더랬다.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들을 수 없는(것 같았던) 인생 선배들의 조언에 눈알을 반짝이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던 나.
조언을 가장한 술자리 수다에 불과했던 말들은 그동안 쌓인 시간만큼이나 기억 저편에 매장돼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개중에 쉽게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종종 생각나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냉철하고 이지적인 분위기의 사뭇 '커리어우먼'의 냄새를 풍기던 한 여자 선배의 입에서 나왔는데, 다름 아닌 "결혼하면 남남 된다"라는 말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말은 '여자' 후배들에게만 해당되는 조언이었다. 서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절친하게 지내는 여학생들에게 "너희들의 우정엔 유통기한이 있다"고 일종의 시한부 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와 내 동기들 사이에 오가는 우정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그 우정 과연 얼마나 길게 갈지 내가 지켜보겠다'는 식의 우월적인 시선과 교조적인 말투는 아무것도 몰랐던 당시에도 왠지 고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를 다짐하게 만들었다. 결혼하면 남남? 흥. 두고 보시지. 우리의 우정은 결혼해도 계속 갈 거야!
이로부터 1n년이 흐른 지금, 결혼하면 남남 된다는 그 고학번 선배의 말은 어쨌든 사실이 아닌 걸로 판명이 났다. 문장에 '어쨌든'이라는 부사를 붙인 이유는 우리가 비록 '남남'은 되지 않았지만 좌우지간에 결혼을 이유로 멀어진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후반 '남친에게 사랑 받는 법' '좋아하는 선배 앞에서 애교 떠는 법' 같은 괴이하기 짝이 없는 정보(라고 부를 수 있다면)들을 '훈녀생정'이라는 미명하에 열심히 공유하던 우리는, 2010년대 초반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2010년대 중후반 뒤늦게 일어난 대한민국의 페미니즘 물결 속에서 이른바 각성의 시기를 지나왔다. 이 과정에서 누구는 비혼-비출산을 다짐했고 누구는 그럼에도 이성애적 연애에 대한 환상을 놓지 못했다.
물론 각자 다른 가치관을 공유하던 우리에게도 몇 가지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가치들은 존재했다. 그 중 몇 가지를 읊어보자면, 한국의 전통적 가부장제는 시효가 다했고(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가부장은 구리고), '좋와좋정'을 가진 남자를 만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좋와좋정이란 좋은 와꾸에 좋은 정신으로, 내 기준에 부합하는 외모와 올바른 정신상태를 둘 다 가진 이성을 일컬음)는 것. 하지만 바로 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가치들이 문제가 됐다.
이성애적 연애에 대한 환상을 놓지 못한 친구들은 결혼이라는 제도 편입됐다. 비혼-비출산을 다짐한 친구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된 친구들의 달라진(어쩌면 십수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괴리감을 느꼈다. 나는 후자였다. 남자를 사귀기 위해 소개팅을 하고, 소개팅에 실패하면 또 하고, 몇시간의 소개팅을 위해 살을 빼고 옷을 사입는 친구들에게 환멸, 멸시, 조소를 느꼈다. 그리고 내가 조소한 그 친구들은 이제 누군가와 결혼을 결심하고, 시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선물을 고민하고, 스드메와 예식장을 예약하고, 웨딩 화보를 찍기 위해 또 다시 다이어트 중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며 쉴 새 없이 울리던 우리의 카톡 대화방은 언제부턴가 조용해졌다. 소위 말하는 '결혼 소비 문화'에 익숙한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 공존하는 대화방에선 결혼을 소재로 한 대화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없다. 한쪽은 모든 일상이 결혼에 집중돼 있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기에 결혼을 제외한 소재로 대화를 이어가는 건 쉽지 않다. 다시 말해 한쪽은 결혼에'만' 관심이 있고 다른 한쪽은 결혼'엔' 관심이 없으니까.
십수 년 전 그 선배의 예언을 정정하자면 다음과 같다. 결혼하면 남남이 되는 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서서히 멀어진다. 2025년 1월 기준 벌써 친구 두 명이 결혼 소식을 전했다. 솔직히 축하하는 마음보다 아쉬움이 먼저 든다. 아, 또 멀어지겠구나... 관련 고민을 아는 언니에게 털어놨더니 이제 친구가 임신하고 출산하면 지금보다 더 멀어진다고 한다. 어쩌면 오래전 그 선배의 말은 사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조금씩 멀어지다 결국엔 남남이 되는 건지도?
정말 멀어지지 않을 방법은 없는 걸까. 왜 여자들만 '결혼하면 남남 된다'라는 이 저주스러운 명제에 부합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