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와 회피 성향의 끔찍한 혼종

by 다현

인간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주장을 믿는다. 여기서 말하는 초인적인 힘이란 본인의 신체 조건을 훌쩍 뛰어넘는 초능력이 뿜어져나오는 것일 수도, 마감 시간이 코앞으로 닥쳐온 시점에 평소 같았으면 이틀 만에 마무리 할 수 있는 일을 1시간 만에 처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에게도 초인적인 힘이 생겨난 때가 몇 번 있는데, 당연하게도 모두 후자의 케이스였다. 레포트 제출이나 업무 마감 같은 것들. 좀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미뤄서 ㅈ으로 시작되는 명사가 될 뻔했다가 겨우 일을 마치고 한숨 돌렸다는 뜻이다.


평소 스스로의 성향을 고려하면 미루기라는 행위를 '극혐'해야 마땅하다. 나는 계획적이고 꼼꼼하다고 알려져 있는 MBTI 'J' 성향이면서(99%의 압도적인 비율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미리부터 걱정하고 우려하는 편이다(MBTI를 맹신하는 사람을 보면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 그렇다면 알 수 없는 미래로 해야 할 일을 유예하기보단 '오늘의 할 일'을 정리하듯 마쳐야 할 일을 조금씩 쪼개 미리 해두는 쪽이 내게 더 맞는 습성일진대 어찌된 일인지 나는 잘 미룬다. 미루는 걸 싫어하고 미루는 스스로를 자책하지만 결국 미루고 미뤄서 막판에 끝낸다. 일을 겨우 마쳐놓고 "다시는 미루나 봐라." 해놓고 또 미룬다.


이 끔찍한 모순 덩어리는 아마도 완벽주의 성향과 회피 성향의 협업으로 탄생한 것일 테다. 그렇다. 나는 계획적이고 꼼꼼하다고 알려져 있는 J 성향인 동시에 "완벽하게 해낼 거 아니면 시작도 마."라는 냉혹한 말로 스스로를 다그치는 완벽주의자이며, 내가 해낸 무언가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땐 그 결과를 쳐다도 보지 않는 지독한 회피 성향을 가지고 있다.


즉, 나의 미루는 습관은 무언가가 정말 하기 싫고 귀찮아서 생겨난 악습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완벽하게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예열하는 시간이 남들보다 지나치게 긴 것뿐이고, 스스로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 현실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 회피하고 외면하다 생긴 가슴 아픈 결과물인 것이다.


웃긴 건 이렇게 미루고 미루다 한 일의 결과물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데 있는데... 가끔은 한두 시간 온전히 작업에 몰두하여 휘몰아치듯 일을 마치고 나면 묘한 쾌감마저 느껴진다.아무튼, 이상은 저 위에 있는데 현실은 내 눈높이보다 아래에 있으니 여간해서 만족하기 쉽지 않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스스로의 작업물에 대해서도.


미루고 싶지 않은데 미룸으로써 생기는 고통이 생각보다 크다. 완벽하지 않아도 우선은 시작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고칠 건 고치고 더할 건 더하면 더 큰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을 텐데...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습성들이 똘똘 뭉쳐 내가 '최고의 버전'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있을 수 없으며 회피는 당장의 모면일 뿐이라는 사실을 머리는 아는데 마음이 거부한다.


당장에 이 몹쓸 성향을 뜯어고치는 건 불가능하니 당분간 미루기를 미뤄보는 건 어떨까. 미루기를 회피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미루기가 회피의 일종인데 회피를 회피할 수 있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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