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한테 느리다고 그랬나
제주에 오기 전 제주에 대한 글들을 좀 읽어보면 느림, 여유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이 많았다.
나도 제주도로 가면 그런 줄 알았다.
해마다 제주로 여행을 왔었는데...
올 때마다 느껴지는 한적함, 여유 뭐 그런 것들이 있었다. ( 일출봉처럼 중국인 관광객이 바글거리는 장소는 예외 )
이제 이사 온 지 9개월이 되어 가는데..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나에게 제주의 시간은 느리지 않고, 오히려 육지에 있을 때보다 더 빠른 느낌이다.
이사 온 초기에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멍하고 있었을 때가 있었다. '바람이 좋네요' 따위의 말이나 하면서 말이다..;; 지금 어느 정도 제주에 적응한 시점에서 보면 하루가 부족하다...-_-;
특히 농사. 난 농사가 이렇게 손 많이 가고 바쁜 건지 몰랐다. 전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집 옆에 딸린 100평 정도의 밭인데... 무슨 잡초는 이렇게 많이 나고, 농작물들은 왜 이렇게 빨리들 자라는 건지... 작년 늦가을에 심었던 감자는 캐다 캐다 못 캔 감자가 아직 절반 이상이다. 그리고 잠시 방심한 틈에 밭 전체를 잡초가 뒤덮어 버렸다. (수습이 곤란할 정도..;; )
지금 밭 상태인데... 예전이라면 가운데의 저 노란 꽃이 눈에 먼저 들어왔겠지만 지금은 저 뒤의 수많은 잡초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저거 진짜 다 어쩔 ㅜㅜ )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는 노릇.. 요 며칠간 열심히 삽질을 해서 감자는 캐내고, 잡초는 옆으로 좀 밀어내고... 딸기, 호박, 방울토마토, 수박, 참외, 옥수수, 땅콩 등을 심었다....... 그러고도 아직 뭔가를 더 심어야 할 땅이 60평 이상 남았다 하...ㅋㅋㅋ( 심을 시간도 부족하고... 그런데 심을 시기를 놓치면 또 안되기에... )
그리고 집도 손을 봐야 했다. 무엇보다 외관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딸아이(5세)가 색을 고르고 내가 칠을 했다 -_-^
사진으로 보니 좀 그런데.. 햇빛 좋은 날 보면 간지 나는 노란색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붕도 색을 좀 바꾸고 싶고, 창호도 싹 갈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역시 시간이 안 난다. 틈틈이 시간 쪼개서 남는 시간에 조금씩 고치는 수밖에 없다.
그 외에 만들다가 만 화덕도 숙제로 남아 있고... 창고 방수 작업도 좀 해줘야 하고... 창고 정리도 해야 하고.. 닭장도 만들어야 한다... 화장실도 리모델링을 직접 해볼까 생각 중이다(욕조가 필요해 ㅜㅜ)..
.... 그리고 현재 주 수입원인 소설도 계속 써야 하고... 애 등하교도 시켜주고, 유치원 끝나면 놀아주고, 재우고..... 이것 외에 소소한 일거리를 말하자면 정말 끝없이 많다. ( 오늘 오전은 밭에 양파 파찌 주으러 다녔고, 오후엔 동네 할아버지랑 낚시를 가기로 했다..;; 낚시 끝나면 애 유치원에서 데려와서 놀고 하면.. 오늘 하루도 끝..;; )
그러다 보니.. 정작 제주 와서 하려고 했던 프로그래밍 공부라던지 게임 개발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나 같은 경우는 딱히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데 이 정도로 바쁜데... 사람들도 만나고 다니면서 제주의 느긋함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떤 생활인지 모르겠다. (내가 속은 건가..;; )
더 웃긴 건.. 나도 바쁘다고 이러는데.. 네이티브 제주인들.. 주위 이웃들을 보면.. 정말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사신다. 아침 6~7시에 일을 나가서 밤 6시에나 들어오고, 집에 와선 또 밤새 그날 수확한 농작물을 가공해서 서울 가락 시장으로 운송 보내고.. 농한기엔 귤 따는 아르바이트하러 다니고...
어쩌면.. 이렇게 바쁜 게 농촌이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도시였다면 이것과는 좀 상황이 달라졌을까....
도시였다면 도시 나름의 또 다른 바쁜 무언가가 생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