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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by 박공원


천천히 읽는 책


캐럴라인 냅은 궁금해하던 작가인데 김명남 님의 번역으로 신간이 나와 얼른 구입해두고 한가해진 요즘 펼쳐보고 있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라는 제목부터 이 책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외향인과 내향인이라는 성향의 차이에 따라 공감의 정도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자신이 내향인이라는 사실에 언제나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내게 이 책은 극호. 거의 모든 곳에 밑줄을 치고 싶은 것을 참고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고 있다.


불편한 특성


책이 좋아서 아껴 읽느라 천천히 읽는 것도 있지만 사실 나는 글을 빨리 읽지 못한다. 대충 읽을 수는 있지만 그건 첫 줄과 마지막 줄만 읽는 것과 다름없다. 빨리 읽으려고 하면 눈은 분명 글을 읽고 있는데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제대로 읽고 싶은 책은 시간을 들여 아주 천천히 읽는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의 일이다. 당시 모두가 좋아하는 만화책(그 책은 아마도 '꽃보다 남자'였던 것 같다. 당시엔 '오렌지 보이'라는 해적판이 있었다)의 신간이 나와서 왜인지 화장실에 숨어(청소시간이었을까?) 친구들과 만화책을 급하게 돌려 읽은 적이 있다. 처음으로 그렇게 빨리 만화책을 읽었는데 책장을 덮자마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음 권을 봐야하니까 마지막 장면만은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가끔 만화방이라도 가게되면 그날의 화장실에서처럼 쫓기듯이 책을 읽는다. 그렇게 애를 써서 겨우 두어권의 책을 읽고 녹초가 된다. 사람들은 만화방에서 느긋하게 쉬는데 나는 특급훈련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당시 만화방이 한시간에 천원정도였는데 삼천원하는 코믹스를 초집중해서 한시간에 한권을 겨우 본다면 없던 초조함도 생긴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어쩔 수 없이 느리게 읽어야 하는 사람이다. 요즘같이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는 참으로 불편한 특성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웹의 넘치는 정보가 부담스럽고 읽기엔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몰라 가십기사처럼 흘려 읽어도 되는 가벼운 정보로 도망치곤 한다. 그나마 디자이너라는 직업탓에 이미지를 읽는 것은 빠른 편이라 시대에 뒤쳐지는 능력을 보완하고 있지만 여전히 글을 읽는 것은 책이라든지 느린 매체를 선호하고, 긴 메일이나 문서도 프린트해서 종이로 봐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얼마 전 한 예능에서 장항준 감독이 요즘 책을 잘 안 읽는 이유로 나와 같은 핑계를 대는 모습을 보고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 있던 김중혁 작가가 ‘그런 사람들은 상상력이 풍부해서 그렇다’는 말씀을 하시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보통은 산만하고 잡생각이 많다고 생각하는 특성을 상상력이 많다고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에 감탄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동안 불편하게 생각했던 나의 약점(?)들이 나의 장기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나의 특성에는 나의 장점도 숨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꾸준히 읽다 보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오늘도 천천히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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