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가 되기로 결심하다
'얀'은 이 유학 일기 시리즈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학기가 시작된 첫날 아침이었다. 아, 아니다. 그건 얀에게 있어서만이구나. 나는 그 친구를 이미 입학시험날 본 적이 있었다.
독일의 음악대학에서 학사과정부터 공부하려면 입학시험 때 피아노를 필수로 쳐야 한다. 나는 어렸을 때 피아노를 오래 쳤었기 때문에 시험을 어렵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피아노 시험장 앞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그곳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웃으며 재잘재잘 떠드는 한국인 무리 옆에서 금발머리에 초록 빛깔 눈을 가진 한 외국인이 긴장으로 인해 표정이 심하게 굳은 채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험을 기다리는 거 맞나 싶을 정도로 그 분위기가 어찌나 달랐던지. 그 대비되는 공기가 재밌어서 그에게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원래 기분과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인 건지, 아니면 숨기지 못할 정도로 크게 긴장한 건지 궁금했었다. 그러던 중 곧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다시 시험장 밖으로 나왔을 때, 그 친구는 이미 내 머릿속에서 깨끗이 잊혀있었다. 학기가 시작되어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학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 학생회로부터 이메일 하나를 받았다. 학생회에서 학기 첫날 아침에 신입생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할 예정이니 참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독일어를 잘 못했던 나는 참석이 필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만약 필수가 아니란 걸 알았더라면 거기 안 갔을지도 모른다. 아침식사를 위한 장소는 피아노 시험을 봤던 바로 그곳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문 앞에서 혼자 서성거리던 나를 어디선가 나타난, 그리고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두 달 전 내가 바로 이 장소에서 봤었던 '얀'이었다. 나도 재빨리 그를 따라 들어갔다.
'입학시험 때 봤던 그 친구네? 얘도 이 학교로 왔구나.'
이 학교에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 하나 없었던 내 마음속에는, 이미 얀을 향한 내적 친밀감이 가득했다. 우리는 거대한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들어온 순서대로 앉는 바람에 우리는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됐다. 용기 내서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나의 비루한 독일어 실력으로 차마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얀이 내게 먼저 인사라도 한 마디 해줬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옆자리에 앉은 또 다른 학생회 친구랑만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네 쪽에 있는 치즈 좀 줄래?'만이 그가 그날 내게 걸었던 유일한 한 마디였고, 독일어를 못했던 나는 내 또 다른 옆자리에 앉은 친구랑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로 아침식사시간을 벙어리처럼 조용히 보냈다.
그날 내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느꼈던 건, 이 낯선 땅에서 입 꾹 다물고 소극적으로 가만히 있는 외국인에게 먼저 다가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나는 내 유학생활을 한국인들끼리만 어울리며 보내고 싶지 않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독일어를 못했던 당시의 나에게는 더더욱. 원래 낯을 꽤 많이 가리는 나는, 다행히도 낯을 가리지 않는 척을 잘했었다. 나의 '인싸' 연기는 그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