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인우 May 25. 2021

지하철에서 만난 청년

아침에 과외를 하러 나가려는 길에 전화로 친구에게 너무 아픈 말을 들었다.

약속은 소중한 것이니 꾹꾹 참고, 꾸역꾸역 지하철에 올랐다. 눈물을 참아보려고 했는데 그만 수도꼭지 틀어놓은 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의 가난에 대해,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생채기를 내는 말을 하는 데도 그 와중에 학비를 벌러 나가야 하는 게 너무 서러웠던 것 같다.


소리를 죽이며 눈물을 삼켜보라고 끅끅 거리는데 근처에 서 있던 키가 큰 청년 하나가 갑자기 내 앞으로 왔다.

환승할 것도, 내릴 것도, 앉을자리가 난 것도 아닌데...

나보다 두세 살 어려 보이는 청년이 굳이 울고 있는 여자 앞에 서다니..

처음엔 의아했는데 그는 끅끅 거리는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내가 우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못 보도록 가려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 놓고 펑펑 울었다.

그는 자신이 내리는 역에 도착할 때까지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한 번도 아래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나도 다음에는 지하철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줘야겠다고 울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청년은 아마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작은 배려를 베푸는 사람이니 사랑받고 사랑하며 잘 살 것 같다.


10년쯤 흘렀을까...

출근길에는 우리 학교 학생들과 우리 학교 몇 정거장 전에 내리는 여고 학생들이 같은 지하철을 많이 탔다.

내 앞에 서 있던 학생이 갑작스럽게 코피가 터졌다. 내 흰 셔츠가 온통 빨간 피로 물들었으니 터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학생은 휴지도 없어서 무척 당황한 것 같았는데 교직 경력 6년 차였던 나는 여학생의 손목을 살짝 잡아 자연스럽게 내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학생을 가리고는 휴지로 학생의 코를 막도록 하고, 물티슈로 교복을 닦아 주었다.


학생은  셔츠를 보며 연신 미안하다고 하여 부러 활짝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교복에 별로 튀지 않아 외려 다행인 듯싶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서 학생은 자기네 학교 역에서 내렸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문득 예전의 그 지하철에서의 청년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기억이 없어도 근처 학교 학생의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 당연히 도왔겠으나 그리 기꺼이 도운 것은 아마도 내가 받은 작은 배려 때문이었나 보다. 그 순간에 그 청년이 떠오른 것을 보면 말이다.


자기 차로 다른 차를 정차하게 하여 위험에 처한 운전자를 구한 시민, 둔기를 휘두르는 사람을 다쳐가며 진압한 시민, 다리에 매달린 사람을 구조대가 올 때까지 붙잡고 기다린 고등학생들...

뉴스에 보니 크고 작은 도움과 배려들이 많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힘든 시기에도 따듯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남의 이야기여도 힘이 난다.

어쩌면 작은 배려와 작은 도움이 우리 사회를 지속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그런 좋은 날이었으면...

작가의 이전글 세 잎 클로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