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인우 Jan 20. 2022

어떤 젊은이의 죽음

어떤 젊은이들이 작업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특성화고를 갓 졸업한 이도 있었고, 발전소의 파견 노동을 반대했던 젊은이도..

다른 젊은이는 다리를 잃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뉴스에 나와도 계속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된다.

하청업체는 그들 월급의 절반 가량을 가져갔다.

파견 근로자들의 죽음은 정규직 근로자의 죽음과 다른 점수가 매겨지는 시스템이었단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면 저들의 죽음에 대한 보상보다 기계를 현대화하거나 노동자의 수를 늘려 안전한 근무 환경을 만드는 것이 비싸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계속 젊은이들이 죽는다.


칸트는 사람을 목적으로서 대해야 한다고 했다.

칸트를 몰라도 사실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이라서 누구도 가르칠 생각도 못 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일에 책임이 있는 어떤 공무원은 개돼지와 노동자를 비유했다. 자기 자식들은 그런 위험에 처할 일이 없다는 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나오지 못한 적도 있다.

그 배는 안전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되고 불법으로 개조한 배였다.


이런 사고들이 운이 없는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일까?

이렇게 자주 일어나고 있다면… 어쩌면 이런 사고들은 필연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인 듯싶다.

젊은이들이 당하는 불행은 내가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구하고 세상을 떠난 기간제 교사는 대통령이 바뀌고 나서야 순직 인정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사람의 가치를 몇 푼의 돈으로 매기곤 한다.


이 사회가 썩어가고 아픈 것에 나도 아프다.

우리가 이름 모를 노동자들의 죽음을, 탈북자의 죽음을, 집이 없는 자의 죽음을 스쳐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격을 논하고, 경제대국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경제를 위해 대기업 임원들의 부정부패를 눈감으라고 하면서 노동자의 죽음은 그의 보상비와 안전 장치 설치에 대한 가격을 비교하는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노동 없이 일구어진 경제 성장이 있었단 말인가?

그들의 노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죽음 위에 서있다면 우리는 거기 서면 안 된다.


어느 중학교에서 의무적으로 했던 노동 교육 1시간이 있었다. 강사는 매우 당연한 말들을 재미없게 했다. 재미가 없어 별로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교무부장이 끝나고 투덜거린다.

저런 교육을 왜 하는 거야. 우리 애들이 노동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되라고 해줘야지.

아... 교육자들이 저런 생각을 하는구나.

특별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평범한 중산층이었다.


대학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 내가 삼촌이라고 부르던, 젊은 5촌 아저씨의 부고를 접하였다.

대학 입학을 축하해 준 삼촌과 또 만나기로 했었는데 그가 죽었다고 했다.

과로사.

몇 날 며칠을 너무 오랜 시간 일하고는 회사 차를 몰고 가던 중에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따듯하고 다정한 분들이 왜 울지 않으셨을까…

그 후로 나이가 아주 많이 먹고 나서야..

비로소…

눈물도 나오지 않는 아픔이 있음을, 믿을 수 없는 아픔이 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 문제들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 모두 아파해야 할 일인지는 알겠다.

다만 그 이름 모를 청년들이 나의 가족이고, 친구였음을…

작가의 이전글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