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야수를 보았다.
1991년이라니.. 그렇게 오래 되었나?
그때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으나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된다.
어릴 때 보았던 미녀와 야수는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였고 용기 있는 사랑 이야기였다.
다시 본 영화는 차별과 혐오에 관한 이야기였고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였다.
벨은 너무 똑똑해서 혹은 너무 앞서 나가서 혹은 전통적인 여성성에 반대해서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는 여성이다. 그나마 미모가 엄청 뛰어나서 구혼자는 많지만 그 부분을 빼면 공감이 많이 된다. 벨이 야수에게 접근하는 방식도 전혀 전통적이지 않다. 간호 따위가 매우 전통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벨은 자기 마음이 움직일 때만 행동하는 여성이다.
외모와 까칠한 성격 때문에 따돌림을 받는 또 다른 남자가 나온다. 그는 누구에게서도 사랑받지 못 했고 감정 표현이 서투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엄청 못 생겨서 따돌림을 당한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못생겼다는 이유로 죽음의 위기까지 간다.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공통적인 경험과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당하고 혐오를 받던 두 남녀는 서로의 마음을 치유해주며 사랑에 빠진다.
영화는 판타지의 힘을 빌려 이들의 해피엔딩을 만들어주지만 그것이 정말 해피엔딩인가 의문스럽다. 못생긴 외모가 잘생겨지는 것, 그래서 타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그것이 전통적인 해피엔딩의 방식이나 역시 2017년에 어울리는 엔딩은 아니다.
그것보다 못생긴 외모여도 인정을 받게 되거나, 아니면 인정받지 못 해도 자기의 삶을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이 해피엔딩인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원래 잘생겼던 애라서 뭐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엔딩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아무튼 개스톤을 보면서(91년에는 가스통으로 나오지 않았었어?! ㅋㅋ) 떠오르는 언론인들과 정치인들이 있었다. 특정인은 우리와 다릅니다. 특정인은 위험합니다. 그러니 없애버립시다. 사람들은 비판 없이 거기에 쉬이 동조한다. 그러고는 상황이 바뀌면 야수에게 가서 환호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죽이자고 하고 마구 부수고 때려놓고는.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고 불편하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더 불편해질 때 동화 같은 결말에 조금 더 가까워질 것이다.
2017년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