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냥 학생
남녀공학을 좋아한다. 지난 10여 년 간 교직에 있으면서 가장 마음이 편했던 곳은 언제나 공학이었다. 단성만 있으면 경쟁률과 긴장감이 훨씬 심해진다. 반면에 공학에 있으면 훨씬 편안한 분위기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아이들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에 서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채로, 운이 나쁘면 중고등학교 6년을 남성 혹은 여성끼리만 지내는 것은 서로의 문화를 배울 수가 없다는 점에서 별로 좋지 않다. 아이들은 6년 동안 이성과 대화하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당한다.
여학생과 남학생의 성향 차이가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은 연극반 지도였다. 여학교에서 연극반을 지도하는 것과 남학교에서 지도하는 것은 냉탕과 열탕만큼의 온도차가 있다. 아마도 예술은 감정을 다루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 감정은 교육으로 인해 많이 통제당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남학생들의 감정을 억압하고 있는지 예술 활동을 하면서 더욱 실감하였다.
여학생들을 데리고 연극을 보러 가면 깔깔깔 거렸다가 금방 훌쩍훌쩍거린다. 가장 먼저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은 무조건 우리 좌석이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는 다수의 학생들에게 왜 손수건 가져오라는 말을 안 했느냐는 원망도 듣고, 선생님은 안 슬프냐고, 왜 안 우냐는 원망까지 듣는다. 학생들 앞에서 울까 봐 이번 주에 세 번 본 것은 비밀로 하였다.
반면 남학생들의 연극반 지도를 하면서는 뷰 포인트 같은 움직이는 활동을 할 때에는 학생들이 마음도 잘 열고, 매우 즐겁게 활동하지만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것에는 매우 어색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연극반인데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학교에서 가장 예술에 대해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모인 동아리인데도 학생들은 감정 표현에 몹시 서툴고, 몹시 어색해한다. 이것을 벗어내는 데에만 1년을 쏟고 있는 것 같다.
남학생들에게 독백을 쓰라고 한 것은 나의 실수였을까? 창작 독백이 필요하기도 하고, 대본에 있는 연기를 하기 전에 자신의 감정을 이용하여 연기를 해보고 대본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창작 독백을 써보라고 하였다. 슬픈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할 것 같아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을 주제로 쓰라고 하였다. 학생들의 글에는 감정이 없었다. 12명 중에 감정을 쓴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즐거웠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즐거움은 어디 있나요?"
이 상황에서 어떤 때에 즐거웠는지를 묻고, 일일이 예시를 들어서 앞부분을 거의 내가 써주다시피 하여 독백을 썼다. 12명 모두의 글을 보느라 동아리 시간에 다 끝나지 않고 하루 종일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다. 다음 시간에 독백을 연습한다는 말을 했더니 학생들은 매우 열심히 자신의 글을 보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 크게 변하지 않아 파일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몹시 귀찮으면서도 수업 끝나고도 하고 있는 아이들이 한편 대견하다.
비단 동아리 시간뿐만 아니라 담임을 하면서 학생들과 상담을 하면 우리가 얼마나 남학생들에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또 여학생들과 상담을 하면 우리가 얼마나 여학생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도 한다. 여학생들도, 남학생들도 모두 감정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거나 바르게 표현하고 있지 않다.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면 매년 성평등 수업을 한다. 어차피 역사 교과서에 있는 내용들에 최근 뉴스들을 첨부한 것이라 학생들이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들은 이 시간을 매우 좋아한다. 처음 들었다면서. 학교를 다닌 12년 동안 그런 말을 처음 들었다고 말이다. 특히 남학생들이 좋아한다. 처음에는 강해 보이고 싶어 하고, 여성들보다 우월하거나 강하다고 말했던 학생들이 실은 여학생들과 같이 가고 싶다고, 조화롭게 살고 싶다고 말할 때, 공교육이 성평등 교육을 얼마나 하지 않고 있는지, 왜 사립 중고등학교가 단성 학교를 고집하는지 하는 여러 생각들을 하며 마음이 더 아프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는 공통점에 비하면 매우 작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심리적인 차이 역시 그렇다. 그리고 심리적인 차이는 신체에서 비롯된 것이 없지는 않겠지만 문화적인 차이와 차별 속에서 증폭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는 그것을 직시해야 하고, 이른바 '남성다움', '여성다움'에 대해, 특히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것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을 꼭 한다. 이것은 나아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춘기 학생들에게 이러한 교육은 매우 큰 울림이 되는 것 같다. 이 시기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갖추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전에 '인간성'을 갖출 것, '외모를 가꾸기 이전에 내면을 먼저 가꿀 것', 이러한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 아이들에게 자유와 치유를 가져다준다.
이따금씩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학생들을 만난다. 아주 많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적지도 않다. 교사들이 그 아이들을 잘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학생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성을 사랑하는 학생들은 훨씬 더 많다. 그것이 과도기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병이라는 사람도 있고, 세상에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나는 그냥 이 모든 학생을 한 명의 학생으로 대한다. 우리는 그저 선생과 학생으로 있으면 된다. 다만, 미션 스쿨의 경우 이 학생들이 '문제아'가 되어 버려서 그것은 또 너무 힘들다. 아이에게는 자신을 숨기는 것이 최선의 삶의 방법이 된다.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부인당하며 살고, 소외되어 살기 때문에 대체로 학교에 적응을 잘하지 못한다. 나는 그래서 이 아이들을 발견한다. 소외된 아이들을 조금 빨리 발견하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는다. 대체로는 그 반대이다. 다수의 학생들에게 차별받거나 은근한 따돌림을 당한다. 혹은 대놓고 비난을 당할 때도 있다. 더럽다거나 하는 아픈 말들이 아이의 가슴에 마구 꽂힌다. 아이는 상담을 받고, 약을 먹지만 대체로 별로 잘 나아지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사회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데, 학교 앞에 부모님 연배의 교회 분들이 동성애 반대를 쓴 커다란 피켓을 들고 서있는데 약으로 나아질까 잘 모르겠다.
사회적인 개념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것은 흑백 같은 반대적인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예컨대 가장 '여성스럽다'라고 하는 것을 10으로 놓고 '여성스럽지 않다'를 0으로 놓았을 때 모든 여성이 다 10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10에 있고, 어떤 사람은 1에 있다. 그것은 남성성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러니 그것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다.
6차 교육과정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서는 우리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고루 갖추어서 미래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 있었다. 나는 중1 때 이 글에 너무 감동을 받아서 이 두 가지를 가지기 위해 무척 애를 썼던 것 같다. 여학교 6년을 다니면서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가지되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 훈련하였다. 그리고 연애를 할 때마다 이상한 말을 듣는다.
"너는 다른 여자들과 너무 달라."
아마도 내가 솔직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해서 그런 것 같다. 우리 문화에서는 대체로 여성들은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고 이중적인 표현을 쓰거나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맞추는 식의 화법을, 특히 연애할 때는 더욱 이러한 화법을 쓰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그것에 익숙해진 남성들이 나에게 그것을 지적했던 것 같다.
정말 다른 여자들은 모두 같을까? 나는 그 남자들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모두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을 범주화시키고, 수학의 집합처럼 벤다이어그램 안에 넣고는 그 사람의 진정한 내면에 가 닿지 않으려는 사람과는 진지한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상대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내면에 가 닿지 않고 집합 안에 넣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결코 깊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수단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목적으로서 대우받기를 바란다. 우리가 한 가지 성으로 벤다이어그램 안에 갇히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인간은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지금까지 젠더로 묶어 놓았던 그 벤다이어그램을 지우고, 조금 더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해도 될까? 적어도 학생들에게는 조금 더 너그러우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