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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인우 Sep 02. 2020

평양, 그곳이 알고 싶다.

- 네 가지 키워드로 만나는 평양 -

  2000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윤리 시간 수행평가로 통일과 관련된 기사를 스크랩했다. 18년 전, 그때만 해도 종이로 된 신문을 가위로 오려 풀로 붙여서 스크랩을 해야 했다. 인터넷 기사를 인쇄할 수도 있었으나 인터넷 기사보다 지면 신문을 신뢰하던 때였다. 통일 관련 기사를 찾는 것은 꽤 어려웠다. 기자들에게 통일은 시의적인 주제가 아니던가. 작은 기사들을 오려 붙여보았으나 큰 스케치북을 몇 페이지 채우지 못했다.


  그리고 6월이 되었다. 전 세계의 언론이 평양으로 눈을 돌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악수를 했다. 쉴 새 없이 플래시가 터졌고 한 신문사는 신문 1면에 광고도, 날짜도, 제호도 내지 않은 채 오로지 두 사람이 악수한 사진으로 전면을 장식했다. 신문은 찍히는 족족 팔려나갔다. 이후로 이산가족이 상봉했고, 금강산 관광이 추진되었다. 나의 스케치북은 스크랩할 페이지가 부족해졌고, 통일이 오는 것만 같았다.


  18년이 흘렀다. 역사를 공부했던 선후배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식당 TV에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고, 북한사를 전공하는 후배에게는 뉴스보다 빠르게 톡 메시지가 오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군사분계선을 한 발씩 넘었다.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순간 떠오르는 것은 평양냉면뿐이었다. 평양 옥류관에서 직접 냉면이 왔다고 하니 그 맛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 순간 목이 메는 뜨겁고 벅찬 감정을 다독이자니 슴슴하고 시원한 평양냉면 국물 한 모금이 절실했다. 다음 날 평양냉면집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냉면을 먹기 위해 두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SNS와 포털에는 종일 평양냉면에 대한 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기대는 한껏 부풀었고, 서로에 대한 갈증은 예상보다 깊었다.



왜 지금 평양냉면인가?


  왜 '평양' 하면 냉면이 떠오를까? 몇 년 전부터 평양냉면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미식가 축에도 못 끼게 되었고, 사람들은 진짜 평양냉면의 맛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열띠게 토론을 했다. 뚝뚝 끊어지는 메밀의 면발과 향긋한 메밀향, 소고기와 돼지고기의 육향이 섞여 단순하지만 단조롭지는 않은, 그래서 슴슴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어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마시게 되는 육수의 맛을 논하며 어느 집이 진짜 평양냉면의 맛을 이어오고 있는가 모두들 자신감 넘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실향민이나 탈북자가 아닌 다음에야 우리 세대는 평양에서 만든 면이란 것은 한 번도 먹어보지를 못 했는데도 이렇게 확신에 차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먹지 못하니 그 진짜 맛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글루텐이 풍부하여 쫄깃한 밀가루 면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뚝뚝 끊어지는 메밀로 만든 평양냉면이 어쩐지 더 건강한 느낌이 들고, 또 자주 맛볼 수 없는 그 매력 때문인지 메밀 면이 엄청 특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조선시대에 면이란 것은 대부분 메밀이었다. 외려 좋은 감자가 많이 나서 감자 전분으로 쫄깃하게 면을 뽑아내는 함흥지방이 다른 지역에 비하면 독특한 면을 먹는 것이었을 게다. 밀가루는 너무 비싸고 귀해서 왕도 자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왕부터 서민들까지 사랑했던 국수의 면은 거의 메밀 면이었다. 메밀 면은 칼국수로 만들 수도 있지만 국수틀이 만들어지면서 대중화가 되었고 지레를 등에 대고 누워 다리를 천장에 대고 버티면서 면을 뽑았다. 이렇게 힘들게 면을 뽑아 먹을 정도로 조상들은 면을 사랑하였다.


  메밀국수를 뽑으면 여름에는 얼음이 없으니 외려 끓여서 육수와 먹거나 비빔으로 먹는다. 겨울에는 집집마다 있는 침채, 즉 동치미 국물에 메밀 면을 말아먹었다. 그것이 냉면이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냉면이란 것은 면이 메밀로 되어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는 것이었고, 팔도에서 먹는 냉면의 모습이 이와 같았다. 다만 메밀의 주산지인 평안도 지역에서 냉면을 가장 많이 소비할 수 있었고, 또 좋은 면이 나왔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골동면(비빔국수)에 대한 설명에서도 ‘관서지방의 면이 가장 좋다.’고 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메밀은 끈기가 없으니 반죽할 때 밀가루, 녹말, 달걀 등을 써서 탄성을 있게 해주어야 하는데 밀가루는 비싸니 녹말을 같이 넣고 뜨거운 물로 반죽해 탄성을 늘리고 압착면을 뽑을 때 바로 뜨거운 물에서 삶아 내고 냉수에 헹구었다. 『동국세시기』, 『진작의궤』, 『부인필지』 등  1800년대부터 1900년대의 냉면에 대한 재료구성을 보면 대체로 무 동치미에(배추 동치미로 소개된 책도 있다.) 돼지고기나 양지머리고기를 넣고 배, 꿀, 잣을 넣은 것이 거의 비슷하다. 조금씩 다른 것은 고춧가루를 넣는지 여부이고, 1915년에 쓰인 『부인필지』의 냉면은 명월관 냉면이라고 하는데 달걀지단이 들어가 있는 것이 다르다. 약 2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냉면이라고 하는 음식은 지금 우리가 평양냉면이라고 부르는 모양과 비슷하다.


  기록들에는 돼지고기를 넣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꿩고기를 넣어 먹기도 했는데 서민들에게는 꿩이 더 구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할머니 댁 뒷산에는 꿩이 많았고, 근처의 밭을 매고 있으면 곡식을 주워 먹으러 장끼와 까투리가 내려오는 일이 흔했다. 겨울에는 아이들이 새총을 하나씩 들고는 꿩 사냥을 다니기도 하였으니 꿩고기를 고명으로 얹는 것도 일반적인 것이다. 기록들에는 소고기는 없는데 조선 시대에 소는 국가의 허락 없이 잡을 수가 없었고, 소고기를 먹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 소고기를 넣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평양에 유흥을 즐기러 온 양반들은 겨울에는 냉면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면이 좋은 관서지방의 냉면은 별미이기도 했고, 술을 마신 다음 날 해장용으로도 먹었다. 심지어 국숫집에서 기방으로 냉면을 배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게에 냉면 그릇을 가득 진 사내가 국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마치 묘기를 하듯 냉면을 그 추운 겨울에 냉면을 배달하였을 생각을 하니 생각만 해도 몹시 춥다. 역시 우리 민족은 배달의 민족이라는 광고 문구가 떠오른다. 여하튼 냉면을 이리 많이 주문했던 기방으로 가보자.



왜 팔도의 미인은 평양으로 모였을까?


  평양은 냉면도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생이 유명했다. 전국의 기생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평양으로 모인다고 하였다. 집안이 개성에서 손꼽히는 갑부였으나 개성 출신이라는 이유로 과거에 합격하지 못 한 한재록은 1820년 『녹파잡기』를 지어 기생들의 재능과 그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한재록은 고객의 금전을 노리는 속물적 기생을 제외하고 품성이 좋고 자부심이 있는 기생들을 위주로 하여 지금으로 말하자면 유명 기생들 66명과 인터뷰를 하여 기생들의 재능과 그녀들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녹파잡기』에 의하면 기생들은 춤, 노래, 연주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와 詩, 書, 畵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학식을 갖춘 기생들도 꽤 많았다고 적고 있다. 기생들은 양반들의 성적 노리개이기도 하였으나 또한 예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통문화를 지켜온 매우 중요한 집단이었다.


  그런데 왜 서울이 아니라 평양의 기생이 더 유명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뒤에 살펴볼 평안 감사 직이 인기가 있었던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경기·충청·황해·전라·경상도는 조운선을 이용하여 서울로 세곡을 옮겨왔다. 그러나 함경도와 평안도는 관향곡이라 하여 세곡을 그 지방 국방비에 충당하였다. 이는 두 도가 너무 멀어 조운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기도 했지만 수확량도 보잘것없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도 함경도, 평안도, 제주도는 세율을 다른 지역에 비해 저율로 수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금을 적게 내는 지역이면 돈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세금이 중앙에 상납되지 않고 평안도에서 자체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관료들에게 자율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권력과 돈이 모이는 곳에는 술과 유흥이 따르고,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생들은 모두 평양으로 모였던 것이다. 이춘풍전에서 이춘풍은 평양의 기생에게 재산을 모두 탕진하였고, 다른 고전들에서도 상인들이 물건을 팔러 평양에 왔다가 기방에 가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도 다시 돈을 벌어 평양의 기생을 만나러 오겠다는 풍자적인 내용들을 보면 평양의 기생들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1930년대 평양에 있던 기생 학교의 교과 과정을 보면 기생들이 춤과 노래, 시. 서. 화를 모두 배우도록 하였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기생들은 근대화가 되면서 초창기의 가수나 배우가 되기도 하였다. 이토록 아름답고, 재능이 뛰어난 여성들은 전통문화를 이어왔던 예인이었으나 결국은 돈 많은 남성들의 성적 착취의 대상이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그네들의 삶은 늘 불안정했고, 그래서인지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1923년 가장 큰 스캔들은 평양 기생 강명화의 죽음이었던가 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서도 살 수 없고,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있으면 사회와 가정이 배척하니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는다는 강명화의 죽음은 큰 이슈가 되었고, 나혜석은 라정월(羅晶月)이라는 이름으로 강명화의 죽음에 대한 칼럼을 실었다. 기생의 삶을 잘 모르나 그 번민과 고통이 공감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은 중한 것이니 자살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칼럼을 썼다.


  한재록이 제목으로 인용한 녹파(綠波), 푸른 물은 정지상의 ‘임을 보내며(送人)’에서 대동강을 상징하는 것이다. 대동강의 푸른 물은 어쩌면 평생 어디 기댈 곳 없이 슬픔을 껴안고도 낯선 남자 앞에서 늘 웃어야 했던 기녀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아 흐르는 것은 아닐까.



왜 평양 감사에 대한 속담은 유달리 많을까?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평양 감사보다 소금 장수’


  유독 평양 감사에 대한 속담이 참 많다. 아니, 평안 감사다. 평안도 감사가 평양에 주재하여 백성들은 평양 감사라고 불렀지만 평안감사 혹은 평안 관찰사라고 해야 옳다. 감사, 즉 관찰사는 종2품 외관직으로 각 도에 1명씩 있어 경기관찰사, 충청 관찰사 등 각 도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 여하튼 관찰사란 각 도마다 1명씩 있고, 민정. 군정. 재정. 형정 등을 통할하였으니 자기 관하의 도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든 지역의 관찰사가 권력이 있는데 왜 유독 평안 감사에 대해서만 저리도 속담이 많았을까?


  김홍도의 ‘부벽루에서의 연회’를 보면 평안감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 알 수 있다. 부벽루에 평안감사가 앉아있고 악사와 무용수, 기녀, 구경 나온 사람들을 다채롭게 묘사하여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연회에 초대받지 못 한 백성들도 좋은 구경을 하고자 각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이 그림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성 뒤로 보이는 능라도의 농민들은 무슨 일이 있거나 말거나 밭을 갈고,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이겠지만.


  앞의 기녀에 관한 글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평안도는 세곡을 경창으로 보내지 않고 평안도 내에서 사용하였다. 운송의 어려움, 군수물자 비축의 필요, 낮은 생산량, 중국에서 오는 사신 접대 비용 부담 등 여러 문제들 때문에 평안도의 세곡은 수도로 가져오는 것보다는 지방에서 사용하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평안도의 감사는 비록 외관직이나 도의 세금을 걷고 사용하는 전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많은 관료들이 가고 싶어 했던 꿀보직이었던 것이다. 감시가 되지 않는 곳에 한 사람이 전권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많은 경우 재정이 유용된다. 그러니 사람도 모여들고, 기방도 많이 생기게 되어 아름다운 기생들이 많다는 평안 감사직을 모두가 한 번쯤은 앉고 싶어 했던 직책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대동강 푸른 물이 내려다 보이는 모란봉의 부벽루에서 저런 잔치의 주인공이 한 번씩은 되고 싶지 않았을까?


  필자는 평안 감사하면 박규수가 떠오른다.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당시의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는 통상 개화론자로 분류한다. 총을 쏘아댄 파란 눈의 외국인들을 보고도 왜 그는 문호를 개방하자고 하였을까?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영향도 있었겠으나 아마도 직접 보았으니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규수는 미국의 어마어마한 함대를 보았다. 쇠로 된 배가 물에 떠 있고, 그것을 우리 손으로 아직 만들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저들이 우리와 친구가 된다면 모를까 적이 된다면 결단코 이길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임진왜란도 물리친 배였으나 이제 조선의 배 따위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될 것임을 그는 예견하였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소식도 더 빨리 들었을 것이다. 작은 섬 몇 개로 구성된 신사의 나라가 대국인 청국을 이겼다고. 그리고 우리가 부순 함대를 가진 나라에서 더 많은 함대를 끌고 조선으로 향할 것임을 그는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무기를 배워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의 쇠 닻줄은 평양 대동문에 걸렸고,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졌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안 한다는 말이 있지만 진실로 개화기 때의 평안 감사는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이양선이 주변을 다니고, 정부는 재정이 없고, 백성들의 아우성에 방곡령을 내리면 배상금으로 갚아야 한다던 그 시절에 그 어떤 자리에 있건 마음이 편하였을까. 조선의 앞날은 풍전등화와 같았고, 공자님도 부처님도 천주님도 조선의 앞날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고 있었으니 위정자들은 어찌해야 나라를 지킬 수가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 한국 교회의 대부흥은 평양에서 일어났을까?


  ‘평양’이라고 하면 개신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다섯 글자가 먼저 떠오른다.

  ‘평. 양. 대. 부. 흥.’


  실은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목사님들이 우리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청껏 외치시니 '그때 평양은 엄청 부흥을 하였구나, 지금 우리는 더 회개해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100년 전에는 나라의 큰 변화를 이끌었던 종교가 이제는 많은 변화의 걸림돌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1900년대의 개신교는 애국계몽운동과 결합하여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의 종교는 단순한 신앙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3.1 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민족 대표들은 종교계의 대표들이었다. 국호도 빼앗기고, 왕도 빼앗겼지만 신앙은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있는, 혹은 나라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은 사상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했고, 종교가 그들을 무장시켜주었다. 그것이 전통적으로 익숙한 유교이거나 불교이기도 했고, 새로 만든 대종교 같은 것이기도 했고, 서양에서 들어와 더욱 강력해 보이는 천주교와 개신교이기도 했다. 비유하자면 종교는 정신적인 갑옷 같은 것이었다.


  대구에서 서상돈이 시작하여 대한매일신보가 앞장섰던 국채보상운동은 개신교의 포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상돈이 주장한 금연, 금주 운동은 기독교적 윤리와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고, 대한매일신보는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사설을 쓰기도 했다. 승동교회는 계몽운동을 추진하는 동시에 독립 운동가들의 만남의 장이 되기도 했다.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늦춰졌을지 알 수 없다. 세브란스 병원은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장 최신 시설을 갖춘 병원이었다. 성도들은 서양에서 온 하나님은 서양의 함대보다 더 막강한 힘으로 나라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원산에서 처음 부흥 운동이 시작된 것은 원산이 개항지였던 것과 관계없지 않을 것이다. 원산은 주민들이 주도가 되어 최초의 근대식 학교를 세운 곳이다. 원산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그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산과 평양에서 시작된 사경회와 부흥 운동 이후로 교회에서의 양반과 상민들 간의 좌석 차별 같은 것이 사라졌다. 사경회를 듣기 위해 먼 길을 걸어오고, 매일 새벽마다 기도회를 하는 열심을 내었다. 이러한 종교적 열정은 죄에 대한 회개와 함께 큰 운동이 되어 전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불행히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어떤 교역자들은 일본에 부역하였고, 해방 이후 신실한 개신교 기독교인이던 초대 대통령의 비호 아래 교회를 키워 온 세력들은 이제 자신의 권력을 놓지 못하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 있기도 하다. 수많은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의 반대에도 큰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하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있다고 믿는 이들은 혹여 통일이 되어 평양에 가게 되면 회개를 할 수 있게 될까?



  통일이 희망적으로 보이니 실은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우선은 문화적 교류가 빨리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장 먼저 해보게 된다. 고조선 시대의 왕검성 유적도, 고구려의 평양성 유적도, 낙랑군의 유적도 우리는 북한이 내어주는 자료만 보아야 하는데 가서 직접 볼 수 있다면 역사 연구에, 특별히 고대사 연구에 큰 발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서울 기온이 38도로 올라갔다. 어디에 있어도 더웠는데 평양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니 평양으로 피서를 가는 생각을 해보았다. 낮에는 옥류관에서 냉면 한 그릇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저녁에는 푸른 물이 흐르는 대동강을 바라보며 대동강 맥주를 한 캔 따서 마시면 이 더운 여름도 쉬이 지나가지 않을까. 그런 날이 속히 왔으면, 그런 날이 평범한 일상이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본다.



참고문헌

 

김상보,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2006

이용재, 냉면의 품격, 반비, 2018

이해조 지음, 김동우 편저, 평양 기생 강명화전, 새움, 2015

한재락 지음, 안대회 옮김, 녹파잡기, 휴머니스트, 2017

유홍준,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중앙M&B, 1998

옥성득, 한반도 대부흥, 홍성사, 2009

동아일보 1923년 6월 15일, 6월 16일, 7월 8일 기사(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보강합니다>  평안감사 속담과 관련하여 조선시기 공납의 잉류분때문이라면 함경도나 제주도 역시 돈이 모여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독자의 질문이 있어 내용을 보강합니다. 조선 후기 대중국 상인의 유통로가 평안도였는데 중국으로 가는 사신, 상인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 평양이었고, 가장 거래가 활발하였던 시장은 의주였습니다. 돈과 물자가 가장 많이 모이던 곳이 평안도였습니다. 글의 분량이 많아 원고를 보내기 전 급히 분량을 줄이다 보니 중요한 내용을 삭제한 것 같아 내용을 보강합니다.



위 글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발행하는 웹진담담 54호에 실린 "그곳에 알고 싶다-네 가지 키워드로 만나는 평양"의 편집되기 전의 글입니다. 사진과 함께 편집된 글은 웹진담담 54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tory.ugyo.net/front/webzine/wzinSub.do?wzinCode=1007&subCode=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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