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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인우 Jan 24. 2021

그때 그 시절, 즉석 떡볶이

여고시절의 모든 것

"안녕? 나는 40번 써니야. 여기 보이지? 써니. 네 뒷 번호야."

우리는 출석 번호 순서대로 앉아 있으니 당연히 이 아이는 내 뒷 번호다. 나는 활달한 성격이지만 처음엔 낯을 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어색함을 풀어내기 위해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하는 편이다. 써니는 등교 첫날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친구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까지 12년 동안 먼저 말을 걸어 준 친구는 써니가 유일하다.

"안녕? 나는 39번 우주인이야."

써니는 환하게 웃으면 치아가 거의 다 보일 것만 같았다. 얼굴이 하얗고 미소가 무척 맑은 아이였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며 참 맑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너는 어디로 가? 우리 집은 *** 아파트야."

"난 17번 버스 타야 해서 그 근처로 가야 해."

써니네 집은 내가 타야 하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었다.

"떡볶이 먹고 갈래?"

내가 치마 주머니 속의 천 원짜리를 만지작 거리며 먼저 물었다.


우리는 학교 앞 즉석 떡볶이 집으로 갔다. 떡볶이 집은 두 개였는데 테이크 아웃이란 말이 유행하기 전부터 컵 떡볶이만 파는 집과 즉석 떡볶이 집이 있었다. 둘 다 맛있었지만 나는 즉석 떡볶이를 더 좋아했는데 혼자 갈 수가 없으니 자주 먹지 못해 항상 아쉬웠다.


학교 앞 분식집에는 즉석 떡볶이랑 짜장 떡볶이, 딱 두 가지 메뉴가 있었다. 우리는 중학교 2학년 개학 첫날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무수히도 많은 날들을 이 두 가지 떡볶이를 먹었던 것 같다. 즉석 떡볶이 집이 학교 앞에 없었다면 중고등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떡볶이가 너무 맛있기도 했고, 학교생활은 꽤 고단했다.


적당히 익은 떡과 라면 사리, 어묵, 야끼만두, 삶은 계란과 갖가지 야채들이 고추장 양념이나 짜장 양념에 하나로 어우러진다.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다른 집과는 맛이 다르다. 양념장에 무언가 넣은 것이 틀림없다. 떡볶이를 너무 많이 시키면 안 된다. 볶음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떡볶이를 다 먹고, "사장님~"하고 부르면 사장님은 이미 볶음밥에 넣을 밥과 참기름, 김가루를 챙기고 계신다. 볶음밥까지 배불리 먹고 나면 사장님은 입가심으로 껌을 하나씩 주신다. 아, 이 집은 완벽하지 않은가!


여름이 되면 볶음밥까지만 먹고 가지 않는다. 그렇다! 옛날 학교 앞 분식집에서는 모두 빙수를 팔았다. 여기엔 팥빙수, 딸기 빙수, 커피 빙수가 있었다. 우리가 아는 그 조합이지만 이상하게 집에서는 나지 않는 그 맛있는 맛!


팥빙수에는 드르륵드르륵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갈린 얼음 위로 연유가 들어가고, 팥과 후르츠 칵테일이 위에 올라간다. 그러나 우리는 딸기 빙수나 커피 빙수를 먹었다. 왜냐하면 딸기 빙수에는 딸기 우유가, 커피 빙수에는 커피 우유가 들어가고, 딸기 빙수와 커피 빙수에는 아이스크림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빙수 위에는 조안나 삼색 아이스크림이 올라간다. 요즘엔 자주 보기 어려운 추억의 맛이다. 지금 먹는 고급 빙수들이 훨씬 맛이 있을 테지만 이상하게 여름이 되면 분식집 빙수가 그립다. 아마도 지나간 학창 시절과 이제는 잘 보지 못하는 친구들이 그리운 것일 게다.


무척이나 친절하신 부부는 떡볶이를 맛있게 해주시기도 했지만 아이들 얼굴을 다 익히셨고, 언제나 존댓말을 하셨다. 나는 그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가 중고생에게 항상 존댓말을 한다는 것. 그 시절에는 중고생에게 존댓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잘 없었다. 게다가 얼굴을 익히고도 존댓말을 하는 사람은 더 없었다. 그러나 떡볶이집 사장님 부부는 언제나 우리에게 존댓말을 해주셨다. 그래서 그 분식집에 가면 우리가 무척 존중받는 느낌이 들어 참 좋았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왠지 예전에 호텔 같은 곳에서 일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그의 몸가짐과 말투가 예삿일을 했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분명 특수한 서비스직을 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만 맛집은 아니었는지 졸업식 날 떡볶이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졸업하는 언니들이 부모님과 함께 여기를 오는 것을 보며 ‘왜 돈까스나 짜장면을 안 먹지?’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생각을 듣기라도 했는지 그 언니는 "엄마, 난 여기가 또 생각날 것 같아. 그런데 이제 자주 못 올 테니까 마지막으로 여기 오고 싶었어."라고 한다. 하긴 나도 졸업하면 거의 유일하게 아쉬운 것이 이 떡볶이 집을 자주 찾지 못하는 일일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들어 분식집을 그만 하셔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몸이 힘드시고, 자녀들도 좋은 직장에 자리를 잘 잡아서 고향에 내려가셔야겠다고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우리들은 그래도 1년만 더 하고 가시면 안 되겠느냐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던 것 같다. 우리가 매일 오겠다고 말이다. 실제로도 거의 매일 갔지만. 할아버지는 그러겠다고 하셨다. 우리 고3 때까지는 하시겠다고 약속을 받고서야 분식집을 나섰다.


나의 절친 써니와 엄마의 생일빵을 나눠주던 화순이와 우리 중에 공부를 제일 잘하고 전교에서 제일 늦게 가방을 싸는 나무늘보보다 느린 쏘세지가 같이 있었던 것 같다. 쏘세지는 중학교 3학년 때 써니와 같은 반이어서 친해졌다. 쏘세지와 나는 성적이 비슷해서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써니와 친해서 친해졌고, 화순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이었는데 이렇게도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고2 때는 각각 다른 반 반장이었는데 그 해에는 유난히 학생회 활동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수련회를 가서도 조교들이 무슨 레크리에이션 부장들보다 더 잘 노는 반장들이 있다면서 무척 의아해했는데 우리는 그때 그렇게 놀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놀았던 것 같다. 전교생이 다 모인 스승의 날 행사에서 화순이와 나는 모든 선생님의 성대모사를 하며 자칫 지루할 뻔했던 행사를 재미있게 만들기도 했다.


2002 월드컵을 간절히 바라며 우리는 1999년부터 체육시간마다 쉬는 시간부터 운동장에 나와서는 대한민국 응원을 하곤 했다. 비록 "꿈은★이루어진다"를 각자의 대학 친구들과 보았겠지만 나는 그 순간에 그 친구들을 생각했다. 몇 년 전부터 했던 우리의 간절한 응원이 우리 국가대표가 4강까지 진출하게 하는데 조금의 힘은 되지 않았을까, 다들 잘 지낼까, 어디에서 이 경기를 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의 모든 만남은 학교 앞 떡볶이 집에서 이루어졌다. 나의 학생회장 선거를 위한 모임도, 또 떨어지고 난 뒤의 회포를 푸는 자리도, 선생님한테 혼나서 열 받는 날에도, 숙제가 많은 날에도, 무언가 축하할 날에도, 누군가의 생일에도... 우리는 각종 핑계를 찾아 떡볶이를 먹곤 했다.


할아버지는 정말로 우리 고3 졸업식까지 가게를 운영해주셨고, 얼마 뒤에 문을 닫으셨다. 그 자리에는 김밥과 라면을 파는 프랜차이즈 분식집이 들어왔다. 언젠가 졸업을 하고 생각이 나서 멀리까지 와보았는데 라면집이 들어서 있어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렸다. 우리와의 작은 약속을 1년이나 지켜주신 사장님께 참 감사했다. 대학생이 되어 만난 친구들과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사장님이 우리 때문에 1년을 더 하셨지? 하고 말이다. 안 그랬으면 우리의 추억이 완성되지 못했을 것 같다며...


고등학생 때 내 꿈은 학교 앞 떡볶이집 사장님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가장 좋은 일은 학교 앞 분식집에서 맛있는 떡볶이를 대접하는 일이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선생님이 그 즉석 떡볶이 집 사장님이 매년 우리 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신다고 말씀해주셨을 때는 큰 감동을 받았다. 몇 천 원짜리 떡볶이가 그리 많이 남지는 않을 텐데 다시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주신다고 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아! 학교 앞 분식집, 문방구 사장님들이야 말로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교사가 되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학습 내용을 잘 전하기 위해서 매일 정말 많은 노력을 한다.


오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은 행복할까? 나는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고 있을까? 어제도 시험인데 늦게 온 아이들을 혼내고, 청소하는데 따라다니면서 잔소리를 하고, 공부 안 한다고 훈계를 하고... 나는 어제 아이들에게 한 번은 웃어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따듯한 말을 건넸을까? 떡볶이 집 사장님처럼 한 번은 미소를 건넸을까?


어쩌면 아이들의 우정은 안전한 공간에서 쌓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10여 년 간의 교직 생활을 하며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우정과 추억이 떡볶이 집에서 생겼는데 우리 아이들은 요즘 ZOOM으로 수업을 듣고 카톡으로 대화를 한다. 우정이 쌓이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운동장도, 분식집과 햄버거집도 빼앗긴 아이들의 일상이 서글프다. 심지어 교실도 빼앗겨 버린 아이들은 어디에서 우정을 만들고 있을까?


20년이 지났다. 나는 오늘도 즉석 떡볶이에 라면 사리를 추가한다. 맛있었지만 역시 여고 앞 떡볶이집 맛은 나지 않는다. 우리의 추억을 만들어 주시던 사장님 부부는 고향에서 잘 지내고 계실까? 셋째를 낳았다는 쏘세지와 조금 멀리 사는 써니, 나이팅게일이 되었다는 화순이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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