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니아 Jan 30. 2022

혼자 가는 여행-춘천

하는 것마다 따라 하고 싶은 친구 Y가 얼마 전 제주도로 긴 여행을 떠났다. Y는 내게 푸른빛의 바다가 담긴 사진을 몇 장 보내왔다. 사진을 보다가, 나도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쓰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창밖으로 멋진 풍경을 보고, 손으로는 글을 쓰는 일.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다. 여행지는 춘천이었다. 7년 전 친구와 단둘이 춘천으로 여행을 온 적이 있는데, 당시 여행이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다. 그래서 그때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다인실 전용이던 게스트하우스가 모두 1인실로 리모델링되어있었다. 하룻밤에 2만 6천 원, 창밖 풍경은 주차장. 가성비가 장땡이다. 주차장 전망을 보면서 글을 쓰는 것도 나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넘쳤다. 이제 상담이 딱 한 번밖에 남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상담을 받았을 땐 상담사 선생님도 느낄 정도로 나의 상태가 좋았다. 더는 울지 않았고 모르겠다는 말로 감정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나도 그걸 느꼈다. 마지막 한 번의 상담 전, 꼭 여행을 가서 그간의 일들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소회가 담긴 짤막한 메모들을 블로그와 일기장에 남겼지만, 각 잡고 앉아서 글을 쓴다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니까. 간 김에 소양강에서 백로도 보고 오리들도 만나고 싶었다.


첫날에는 저녁 시간에 숙소에 들어와 가볍게 저녁을 때우고 자리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갔다. 다른 일 할 때는 절대 그렇지 않지만, 나는 한번 글을 쓰기 시작하면 꽤나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다. 쓰다 보면 운동장을 달린 사람처럼 허기가 진다. 그러면 달달한 음식을 입에 넣는다. 아, 내가 그래서 살이 쪘나 보다. 첫날은 뭘 먹다가, 글을 쓰다가, 드라마를 보다가, 다시 글을 썼다.


둘째 날에는 새를 보러 나섰다. 소양 1교, 2교와 우두 교에서 새를 촬영하는 탐조인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양강은 생각한 것보다 더 좋았다. 물이 맑아 강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색깔은 푸르게 빛났다. 끝을 모르고 펼쳐진 강이, 마치 바다보다 더 넓고 깊은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소양강을 점령한 건 다름 아닌 물닭이었다. 물닭은 언뜻 보면 오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닭과 흡사하게 생겼다. 머리는 까맣고 몸통은 회색이고 눈은 빨갛다. 족히 몇천 마리는 되어 보이는 물닭들이 소양강을 유유히 활보했다. 그중에는 비오리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자리를 옮기니 오리들이 보였다.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노을과 함께 새들을 관찰하고 싶어 우두교로 향했다. 일몰 시각까지는 2~3시간 정도 남았기에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요즘 재밌게 읽고 있는 양다솔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읽었다. 글을 읽으면 나의 글 주머니에도 글이 가득 담기는 기분이다. 특히 이렇게 통통 튀고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글자를 읽으면 더더욱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생각들이 많이 떠올랐다. 휴대폰 메모장을 꺼내 생각나는 대로 기록했다.


5시 20분, 해가 점점 지기 시작했다. 짧아진 겨울 해가 넘어가기 직전인 5시 ~6시는 정말 아름답다. 강물에 주황색 노을이 비친 풍경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을 보니 내 마음도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날씨가 매우 추웠지만 조금 더 힘을 내어 춘천 철새도래지까지 걸어갔다. 얼마를 걸었을까, 커다란 카메라로 새를 찍는 탐조인을 만났다.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다. “저, 선생님….”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칭칭 감은 그가 나를 쳐다봤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새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지금 저기 있는 흰꼬리수리는 무조건 찍어야 할 것 같아서 왔다며, 내 시선이 미처 닿지 못한 한 나무를 가리켰다. 나는 소양강에 물닭이랑 오리들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그곳에는 천연기념물 흰꼬리수리가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바로 앞에 있는 천연기념물을 못 본체 지나칠 뻔했다. 그는 ‘흰꼬리수리’를 태그하여 SNS에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탐조인’이 되려면 그처럼 밀리터리룩을 입고 큰 대포 카메라를 사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맨눈으로 새를 보러 다니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망원경을 하나 사고 싶다. 오늘 내가 과연 몇 마리의 새들을 놓쳤는지 모를 일이다. 종일 밖에서 찬 바람을 쐬었더니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숙소로 돌아가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향긋한 로션을 얼굴에 발랐다. 편의점에서 사 온 꿀물을 홀짝이며 인스타그램을 켰다. ‘흰꼬리수리’를 검색하니, 그가 찍은 사진이 맨 위로 올라와 있었다. 약속을 지켜주어 감사하다는 의미로 '좋아요'를 눌렀다. 그날 밤 나는 글을 조금 더 쓰다 잠들었다.


셋째 날, 정오가 다되어 눈을 뜨니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밤새 눈이 온 모양이었다. 눈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사실상 여행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아쉬워서 외출하기로 했다. 눈에 파묻힌 김유정 문학촌도 꽤 멋지리라 생각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섰는데 차편이 애매해 택시를 잡아탔다. 여행하는 동안 누군가와 오랜 시간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였을까, 택시 기사님과 말이 아주 잘 통했다. 눈이 많이 와서 택시들이 많이 없다는 이야기, 차가 더러워져서 곧 세차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 별 것 아닌 일상적인 대화들이 반가웠다. 비축해둔 에너지가 많아서 그런지 대화가 즐겁게 느껴졌다. 기사님은 김유정 문학촌이 혼자 구경하기 알맞은 곳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오늘은 눈까지 와서 더 포근하고 예쁠 것 같다고 그랬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어딜 가느냐고 김 빠진 소리를 하지 않는 기사님이라 다행이었다.


김유정 문학촌에 들어섰다. 입장권을 사려는데 매표소에 앉아있던 중년의 여성이 대뜸 내게 ‘백신 부작용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없었다고 답했다. 초면에 백신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꽤 웃겼다. 나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며 대화를 이어갔다. 입장권은 2천 원이었고 2천 원으로 봐도 될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택시 기사님의 말처럼 김유정 생가와 주변 연못에 눈이 내려 더욱 예뻤다. 하얗게 쌓인 눈 사이로 검은색 고양이가 살금살금 걸어가는 걸 봤다. 고양이는 앙증맞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 옆으로 나의 발자국이 찍혔다. 사람 없는 눈밭에 나와 고양이 둘 뿐인 것 같았다. 혼자, 눈 오는 날, 김유정 문학촌을 들려서 참 다행이었다.


여행은 이렇게 끝났다. 별것 없는 여행이었는데 어찌나 풍족하고 행복하던지.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그리고 혼자서 만족스러운 여행을 했다는 게 새삼 감사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내가 아니라, 나의 실패에 묶여서 좌절하기만 하는 내가 아니라, 내 발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좋고 맛있는 것들을 누렸다는 게 참 좋다. 아마 이번 춘천 여행은 절대 잊지 못할 것만 같다.

작가의 이전글 나누는 것 밖에 모르던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