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니아 Aug 20. 2022

야식의 신

<취업이 안 돼서> 8편

속이 허했고, 그래서 먹었다. 반복되는 폭식의 문제를 상담사에게 고하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하루에 배달을 두 번씩 시켰다. 주로 맵고 짠 종류의 음식들. 그런 걸 먹고 나면 왜 이렇게 단 것이 당기는지 모를 일이다. 통 잘 안 먹던 와플과 케이크를 시켜 먹는 사치도 부렸다. 돈 절약이라는 건 안중에도 없고, 절제도 없었다. 얼른 음식이 내 입으로 들어와야 허한 속이 좀 차는 듯했다. 이건, 영혼의 문제였다. 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식의 신(?)은 나의 영과 육을 지배했다. 바삭한 치킨 한 마리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이라며 거짓된 메시지를 속삭이기도 했고, ‘인생 사는 거 뭐 있나. 맛있는 거 먹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을 불어넣었다. 나의 숭배는 식사의 기쁨이 끝나면 허무하게 사라졌다. 현혹되는 나 자신을 타인에게 오픈한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모범적인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솔직하게 행동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친한 친구들마저 나를 절제에 능하고 단정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더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다. 만일 그들이 우리 집에 와서 널린 배달 용기들을 본다면 ‘헉’하고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남들이 다 겪는 어려움도 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척, 멘탈이 강한 척. 그런 ‘척’이 쌓이면 이렇게 혼자 있는 순간에,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게 척이기 때문에, 문제인 거다.


폭식은 나를 쳤다. 살을 7kg나 찌웠고 위의 기능을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먹는 순간에는 행복하지만 먹고 돌아서면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통장 잔액은 점점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남는 건 배달 어플 서비스 첫 화면에 뜨는 ‘VIP’ 화면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야식 끊어야지!’ 하는 결단으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건 참 많지 않다. 계획을 짜고 하루를 바쁘게 채우면서, 점점 야식을 먹는 시간을 잊으려 애썼다.


우울이 폭식을 부르고, 몸을 해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심리상담이 끝나기 직전 성격검사를 한 번 더 했고, 거기서 상담사는 내가 어딘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래서 순순히 폭식에 사로잡혀있노라고 고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상담을 받은 뒤부터 내가 먹을 밥을 직접 요리해서 든든히 먹는 습관을 들이게 됐다. 건강한 식재료를 구매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상담실에 들어서면 내가 나를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를 찬찬히 점검해야 해야 한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다는 걸 알지만 멈출 수 없던 나는, 독에서 빠져나온 물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안 좋은 습관을 줄여나갔다. 결국, 나를 바꾸는 건 나였다.


문제를 드러내면 부끄럽고, 속상하고, 내 자신이 이거밖에 안 되나 싶지만.. 또 생각보다 괜찮기도 하다. 야식의 신에게 사로잡히는 것보다, 내가 야식의 신에게 현혹되고 있다는 걸 회피하는 게 더 큰 문제였을 테니.

이전 07화 감정 상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