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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Aug 20. 2022

감정 상담

<취업이 안 돼서> 7편

2021년 12월 28일에 기록한 상담 일기


감정 카드를 이용한 상담을 진행했다. 30개의 감정 낱말 중 올해 가장 적게 느낀 감정 순으로 낱말을 지워가는 활동이다. 그렇게 지워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내가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만 남게 된다. 선생님은 순간순간 느낌으로 지워나가는 게 아니라 낱말에 오래 머무르면서 감정을 충분히 느껴야 한다고 했다.


기쁘다, 인정받다, 슬프다, 질투 난다, 해냈다, 속상하다, 우울하다, 불안하다… 각각의 낱말을 쳐다보니 그 감정에 해당하는 에피소드가 절로 생각났다. 내가 언제 기뻤더라? 얼마 전에 크리스마스에 친구와 만나 케이크를 먹을 때 참 기뻤는데. 인정받았던 경험은 인턴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종종 있었지. 슬프다는 감정은 내가 요새 자주 느끼는 거 같아. 질투 나는 경험이 아주 많았지. 해냈다? 내가 뭘 해낸 게 있나, 난 올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것 같아.


자꾸 좋은 감정들을 지워나가게 되길래, 무의식적으로 긍정적인 낱말을 남기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낱말들은 죄다 부정적이었다. '우울하다', '지쳤다', '속상하다.’ 괜히 머쓱해졌다. "너무 나쁜 낱말들만 남네요" 하면서 웃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좋은 말만 남으면 여기 앉아있을 필요가 없죠."라고 말했다.


낱말들을 이용 상담이 진행됐다. 집중이 필요한 감정에 머물러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선생님이 선택하신 건, 그 많고 많은 낱말 중에 하필 ‘할 수 있다’였다. 선생님이 물었다.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학생이었다. 무모한 도전을 많이 했고, 힘들었지만 스스로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주변에서도 그런 나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작은 것 하나라도 해내고야 마는 나.


아, 그런 나를 만난 지 너무 오래됐다. 불과 몇 년 전인데 그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대학생이었던 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 저는 지금 너무 초라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전 열심히 하고 늘 잘하는 아이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고 하는 것마다 다 실패해요. 그때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같아요.” 마음속 어딘가에 잠식되어 있던 자기 연민이 솟구쳤다.


나는 행위로써 존재를 증명하려는 사람이었다. 존재 자체가 존중받을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고 성취해야만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선생님은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실 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정확히 그렇게 말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내가 이해한 바는 그렇다. 대학생 때와 지금, 나의 모습이 너무 다른 것 같아 속상함이 크지만…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소중한 존재라고. 그런 당연한 말이 그날 상담의 주 내용이었다.


감정 카드는 충분히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상담을 받으면서 드는 생각은 누군가 나의 감정을 알아주기만 하더라도 큰 도움이 된다는 거다. 상담을 받다 보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터져 나올 때가 있다. 오늘 감정 카드를 하면서도 그랬다. 내 마음이 머물러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곳이 어디인지 느꼈다.


한바탕 감정 카드 상담이 끝나고, 선생님은 내게 2022년 가장 많이 만나고 싶은 감정을 찾아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해보라고 시켰다. 나는 ‘해냈다’, ‘기쁘다’, ‘행복하다’, ‘열정 있다’ 등의 긍정적인 낱말을 찾아 동그라미 했다. 그리고 큰소리로 읽었다. 읽는 순간 나도 알았다. 어떻게 인생이 이런 긍정적인 감정만 있겠냐고. 그래도 이건 소망이니까. 2022년에는 해내는 나, 기쁜 나, 행복한 나, 열정 있는 나를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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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일기를 다시 읽어보는 2022년 8월, 나는 해내고 있다. 참 많은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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