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니아 Apr 04. 2023

증명을 멈출 수 있을까?

일하는 마음

잘 보이고 싶은 대상이 생기면 무리해서 떠들게 된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증명하고 싶어서다. 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고, 이 정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물론 마음에 사랑이 많은 날엔 이런 내 모습도 귀여워 보이지만, 없는 날엔 되게 밉게 느껴진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아무도 권하지 않는데 못 먹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시키지도 않은 야근을 하고, 보지도 않은 드라마를 재밌게 본 척 거짓말했다. 물론 여전히 나의 증명하기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그래도 눈물바람으로 퇴근하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내성은 생긴 모양이다. 조금은 더 솔직하게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못하는 게 많다. 드라마 전체를 보는 기획적인 눈이 없고, 자잘한 사건을 만드는 아이디어가 부족하고, 의견을 낼 때 자기 확신이 없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말을 잘 못 섞고,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못 띄운다. 여전히 못하는 리스트들은 불어나고 있고, 그걸 마주할 때 무척이나 괴롭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잘하는 것 몇 가지도 함께 발견된다는 거다. 대본에서 개연성이 어그러진 부분을 찾아내고, 캐릭터를 매력적이게 만들 수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술은 못 마셔도 술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는 인내심이 있고(속으로는 울고 있지만..),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서 피드백을 전달하는 소통능력이 있다.


못하는 것까지 잘하려고 애쓰다 보면 자꾸 나의 한계만 보인다. 근데 못하는 게 있다는 걸 인정하고, 이제부터라도 배우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니까 마음가짐이 좀 달라졌다. 아니면 못하는 건 못하는 대로 두고, 잘하는 걸 더 잘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맘도 새롭게 생겼다.


못하는 거 붙잡고 늘어지는 건 그만하고 싶다. 없는 나를 꾸며내서 사람들한테 잘 보이는 것도 안 하고 싶다. 계속 포장하다 보면 점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든다. 앞으로 날 증명하고 싶은 생각이 수도 없이 찾아오겠지만 그때마다 생각해야지. 나는 못하는 것도 있지만, 잘하는 것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구태어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술은 못 마시고 술자리도 안 좋아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