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못 마셔도 술자리는 좋아해요”라는 말을 진심으로 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으면 나와보라 해!...(사실 엄청 많을 것 같다.) 물론 나도 집에서 바지 버클 풀어헤치고 음식 와구와구 집어먹는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좋아한다. 그런 거 말고, 자꾸 짠을 해야 하고 건배사도 해야 하고 업무적인 이야기도 곁들여야 하고 다른 사람들 술잔이 비어있진 않은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하는 그런 술자리 말이다. 그런 것도 다들 좋아할까?
얼마 전 친구네 회사 회식문화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차는 술 없이, 2차는 원하는 사람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립박수를 쳤지만 술 좋아하는 친구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왜. 도대체 왜 꼭 술이 있어야 하는 건데. 1차 맛있게 밥 먹고 2차는 카페로 가면 안 되나? 도대체 술 마시는 문화는 누가 만든 거야"라고 투덜대는 내게 친구는 방금 말한 그걸 글로 써보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쓴다. 어쩌면 이 업계에서 일을 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아 보일 나의 진짜 속내를.....
술을 잘 못하는 나는 술자리가 좀 괴롭다. 술을 즐기는 사람들의 텐션을 따라가기 버거워서다. '꼭 따라가야 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들 하하호호 즐거운데 나만 분위기 못맞추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싫다. 차라리 그냥 즐거운척 행복한척 나도 술에 취한척 연기를 하는게 더 편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술은 효율적인 관계를 위한 도구라는 점에서 용이한 구석이 있다. 비장한 얼굴로 자신들의 전문성을 마구 드러내던 사람들이 술만 들어가면 표정이 풀어지고, 자세가 편해지고, 목소리가 커진다. 나는 술의 힘을 빌어 누군과와 관계를 시작해 본 적도, 속 깊은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다. 관계에는 적당한 거리와 속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지점이 나와 다르다면 굳이 친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일은 달랐다. 빠른 시간안에 관계를 쌓아서 원활하게 소통해야 하는 일의 세계는, 배타적이었던 나의 관계망과 차원이 다른 세계다.
술은 분명 (그들에게) 빠른 친밀감 형성의 도구인듯 하다. 그래서 나는 어제도 “술은 못 마시지만 술자리는 좋아해요”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게 나의 도구는 아니지만 당신의 도구라면, 나도 그렇게 말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술자리는 업무의 연장이고, 나는 돈버는 사회생활이 하기 싫은 것도 하는 거라는 걸 알아가고 있다. '다들 속으로는 얼른 집에 가서 전기장판 틀어놓고 자고 싶다.라고 생각할 거야'..라는 나만의 생각을 하면서. 나 빼고 모두가 이 자리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이방인이 된 거 같아서 말이다.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고 취하기 전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숨이 가빠오는 알쓰인 나는.. 그렇게 생각해야 맘이 편하다.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해 볼 수는 있잖아. 그냥.. 술 말고 커피를 마시면서.. 소개팅마냥 점잖게 서로를 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어제 선배는 술 때문에 고민하는 나에게 "커피못 마시면 차를 마시면 되듯이, 술을 못 마시면 음료수를 먹으면 되는 거야"라고 말하며 본인은 소맥을 원샷했다... 2차는 카페, 어떻게 안 될까요? 그게 안 된다면, 나라도 이 업계에서 오래 살아남아서 2차는 카페로 가는 은혜로운 풍경을 언젠가 만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