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순간에 날 찾는 널 보며, 나는 억울해하였다. 너는 나의 힘듦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기쁠 때만 연락해 염장을 지르는 게 아니니 다행이다 생각하자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충분한 동력은 아니었다.
내게 슬픔을 토로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나는 힘겨워져 마음의 문을 모두 닫고 싶었다. 하루 이틀일은 아니다.
"엄마, 내 주변에는 슬픈 일을 경험하는 친구들이 많아." 불과 초등학생 때의 일이었다. 엄마는 담백한 어투로 '친구를 잘 위로해줘'라고 말했지만, 난 그것을 하늘이 내게 특별히 부여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분명 친구들이 내게만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성실히 그 역할을 수행했다.
말하는 이는 그렇지 않은데 듣는 이의 모습이 되레 심각해졌다. 하루 종일 친구의 일을 떠올리고 편지를 썼다가 문자도 보냈다가 내가 도움이 될 수 없음에 애통해하며 울기도 했다. 누군가 내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짐을 혼자 짊어진 것이었다. 죄책감에도 오래 시달렸다. 여전히, 지금도 그렇다.
내가 그러했으니 너도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유치하고 얄팍한 본성이 툭 튀어나올 때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넌 나의 힘듦에 관심이 없으면서 왜 힘든 일 생기면 날 가장 먼저 찾아, 사실 그게 불만이었던 거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저 남에게 힘듦을 토로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지 그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누구도 내게 그 이상의 무게를 짊어져달라 한 적이 없었다. 그걸 깨달으니 조금 아팠지만 약간은 더 자유롭게 되었다.
여전히 불안하고 피곤하다. 내가 너를 잘 위로하고 있는 걸까? 내 존재가 너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검열하느라. 그 사고를 멈추는 순간 나는 이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게 될까. 나는 억울한데, 이 억울함을 해소할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짐을 짊어지기로 결정한 건 결국 나 자신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