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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Oct 06. 2021

어딘가 불이 붙었다

말랑말랑한 촛농

좋게 말하면 책임감, 나쁘게 말하면 지나친 주변 시선 의식. 난 그걸 자양분으로 삼아온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잘 혼 나본적 없는 나는,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내고 얻는 ‘인정’을 삶의 기쁨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이제 그걸 그만두기로 했다.     


퇴사를 결심한 날, 공교롭게도 선임 선생님이 나를 불러 앞으로 내가 더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말해왔다. 책임감 그리고 인정욕구 자극. 아주 취약한 지점을 제대로 건드린 거다. '퇴사를 조금만 늦춰도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내 결심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뻔'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여기서 한 발 물러서기엔 나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1분 1초가 아까운데 애꿎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인생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유치하지만 나는 내 삶에 꼭 들어맞는 정답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삶이라는 건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 모습 저 모습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촛농에 열을 가하면 금세 말랑말랑해져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내 안에 작은 불 하나만 있으면, 난 이 모양도 될 수 있고 저 모양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예상치 못한 일들 속에서 살아가며 나는 그걸 배웠다.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으면 난 저렇게 답해야지' 하며 면접 준비하듯, 나는 그럴듯한 나만의 대답 리스트를 준비해왔다. 하지만 이제 남에게 증명해 보이는 삶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기엔 시간이 아깝다.  

   

새 출발의 기념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볼 계획이다. 바로 운전면허 따기. 조금 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퇴사와 운전면허 계획을 말했다. 엄마는 갑자기 웬 운전면허냐, 그럼 취업은 어떡하냐, 돈은 어떡할 거냐, 그런 흔한 말 한마디 없이 "우리 동네에 운전면허 학원 생겼다"는 말 뿐이었다. 울 엄만 최고다. 나도 미래에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 한 명이면 충분하다. 이제 어느 고속도로를 탈지, 어디서 멈출지, 누구를 태울지는 내 몫이다. 난 말랑말랑한 촛농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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