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 건너 오른쪽으로 돌면 대야 재래시장 골목이었다. 누나는 전에도 이 시장 골목에 배 씨 아저씨를 데리러 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빠가 픽업트럭에 누나를 태우고 나가 술에 취한 배 씨 아저씨와 돌아온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가끔 아빠와 얘길 나누다가, 엄마 잃은 율이 누나도 불쌍하고 병으로 아내를 잃은 배 씨 아저씨도 불쌍하다며 한숨을 쉬셨다.
ㅡ얼마나 상심이 크면 저러겠냐면서도. 그래도 이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데.
ㅡ율이를 봐서라도 배 씨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말이야. 아버지도 동료 기사였던 배 씨 아저씨를 측은하게 여기셨다.
재래시장 골목이 끝날 즈음, 으뜸 떡방앗간 맞은편에 아모르 미장원이 보였다. 미장원과 서해 바지락 칼국수 집 사이에 슈퍼와 로또 판매점을 겸하고 있는 대박슈퍼가 보였다.
술에 떡이 된 배 씨 아저씨를 태우고 온 날 밤에 아빠는 대박슈퍼 얘길 해주셨다. 아빠 말대로라면, 거기 '대박슈퍼'는 이름대로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담뱃진이 찌든 냄새와 여름 장맛비로 핀 곰팡내, 홀아비 냄새를 참아가며 수컷 들끼리 서로의 것을 빼앗아 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장소였다. 누나는 슈퍼 오른쪽 샛골목에 내려달라고 말했다.
ㅡ인영아, 누나가 들어가서 아빠를 모시고 나올게. 너는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말고 여기 기다려줄래. 그녀는 대박슈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액막이 명태가 달린 출입문 종이 '딸랑'하고 울렸다. 나는 잠시 틈을 두고 조용히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박 슈퍼 사장님 입장에서는 도박꾼들에게 골방을 빌려주는 게 화투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일타쌍피 이득이었다. 슈퍼 손님을 받다가 골방에서 술이나 담배 주전부리 안주 그리고 라면이나 계란말이 등 간단한 식사거리 비용을 받을 수 있으니까. 방을 빌려주는 비용은 덤이었다.
슈퍼 사장님 눈치가 보여 과자를 고르는 시늉을 하며 진열대를 오갔다. 누나가 슈퍼 안쪽에 미닫이문을 열자, 안에서 메케한 담배 연기가 선풍기 바람을 타고 슈퍼로 새어 나왔다.
ㅡ이봐, 배 씨. 문 앞에 자네 딸 왔어. 어서 나가봐. 골방 안에 누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ㅡ안녕하세요. 누나는 방안의 남자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ㅡ아, 한참 끗발 오르는데... 아저씨는 작은 체구로 까맣게 탄 얼굴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었다. 방에서 뭉그적거리며 나오더니 바닥에 있는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었다.
배 씨 아저씨는 화신 택시 회사명이 새겨진 남색 망사 조끼 밑으로 손을 넣어 배를 북북 긁다가 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누나에게 걸어 나왔다.
ㅡ아빠, 한참 택시 일할 시간에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어떡해. 기백이 삼촌이 걱정된다고 전화하셨어.
ㅡ기백이 그 친구는 쓸데없이. 사람 쉬는데 스토커처럼 못살게 구네. 아빠 여태 일하다가 잠시 커피값이나 벌어볼까 하고 노는 거야. 한낮엔 더워서 택시 손님도 없어. 너는 성경학교인지 뭔지 다 끝났니? 다 끝났으면 어서 짐 싸서 익산 자취방으로 가.
ㅡ내일 오후에 갈 거예요. 아빠 여기 계속 이러고 계실 거면 택시 키 저한테 주세요.
ㅡ무슨 키를 달라는 거야. 간드러지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거칠고 굵어졌다.
ㅡ지난번처럼 또 술 드시고 택시 운전하실 거잖아요. 누나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ㅡ어디 딸년이 버릇없이 아빠한테 자동차 키를 내놔라 마라야. 술에 취한 아저씨가 누나의 뺨을 때렸다. '짝'하고 땀에 전 손이 뺨에 달라붙는 소리나 났다. 율이 누나의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큰 소리였다.
ㅡ배 씨, 왜 그래. 딸이 걱정돼서 아빠 보러 온 건데. 따님이 참아요. 참아. 아빠가 술을 좀 과하게 드셔서 그래. 슈퍼 아주머니가 배 씨 아저씨 팔을 뒤쪽으로 잡아끌었다.
ㅡ어미 없이 자란 거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는 거냐. 계집애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훈계질이야 훈계질이. 이제 다 컸다는 거냐. 에이, 오늘 아주 제대로 망신살이 뻗쳤네.
술주정하는 아저씨의 앞니 사이는 군데군데 까맣게 썩어 있었다. 치과에서 충치 치료받은 곳이 오히려 하얗게 도드라져 볼썽사나웠다.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뜬 누나를 슈퍼 문 앞에 세워둔 채, 아저씨는 바지춤을 올리며 뒤돌아섰다. 골망 미닫이문을 열다가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ㅡ어, 이게 누구야. 우리 태성이 형님 막내 도련님 아냐.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꼬깃거리는 천 원짜리 몇 장을 손에 들려주고는 들어가 버렸다. 누나의 오른쪽 뺨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에 빨갛게 도드라진 손자국이 보였다. 모멸감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슈퍼 문을 나섰다. 나는 아이스크림 통을 열고 고드름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들고 스쿠터로 돌아갔다. 누나는 스쿠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다가가 고드름 하나를 내밀었다.
ㅡ누나 이걸 뺨에 좀 대봐. 그녀는 말없이 고드름을 건네받아 오른쪽 뺨에 문질렀다.
ㅡ그만 집으로 가자 인영아. 스쿠터의 시동을 켜자, 누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고드름을 꺼내 씹어 먹었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돼가는데 더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스쿠터의 시동을 켜자, 머플러에서 타다만 휘발유 냄새와 함께 검은 매연이 뿜어져 나왔다. 다시 철길을 건너 4차선 도로를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돌아가는 길엔 희미한 바람의 흔적이 느껴졌다.
율이 누나는 내 등에 몸을 밀착시켜 허리를 안았다. 아카시아 향기와 땀 냄새가 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내 등에 전에 없던 손과 눈, 그리고 코가 생겨났다.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일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