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빠빠리 Oct 24. 2024

땅끝의 태양

불멸의 해

땅끝의 태양 (불멸의 해)


'Life goes on.’ 라디오에서 들려온 멘트가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렀다. 한 젊은 예술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면서 뉴스 끝자락에 리포터가 한 말이었다. 그 젊은 예술가에게는 다섯 살의 어린 아들이 있다고 했다. 아, 너무 어리구나. 무해하기만 한 저 어린아이가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마음 한편이 쓰라렸다. 세상 곳곳에서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또 누군가는 쓸쓸한 침묵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독대해야 했다. 

‘두려워하지 마. 누구나 겪는 이별을 네가 조금 일찍 겪었을 뿐이야’.

언젠가 해가 내게 해준 것처럼, 나도 이름 모를 다섯 살의 소년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숨만 쉬면 살아져’.

열세 살의 해가 내게 가르쳐준 살아가는 방법. 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매 순간, 나는 단순히 숨만 쉬었다.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 애썼다.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 죄책감, 해의 유서를 읽으며 밀려왔던 수많은 감정들을 그저 숨만 쉬는 단순한 반복 속에서 견뎌내려 했다. 오래전 어느 봄날, 잠들어 있던 내 손에 아카시아를 쥐어준 사람이 종수가 아니라 해였다는 사실을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해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을까. 해의 내면에 드리워지기 시작한 어둠의 그림자를 알면서도 내가 닿을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해에게 나는 왜 아무 위로도 해주지 못했던가. 내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에 내 심장과 함께 호흡한 존재가 해였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한 나의 부끄러움이 시계의 초침처럼 끊임없이 움직였다.  


해안가를 따라 운전을 한 지가 벌써 일곱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하얀 모래들이 깔린 해변들을 지나면서 생각했다. 이대로 달리다 보면 이백 년이 걸리지 않아도 이곳의 많은 해변들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어쩌면 그 여행의 끝에서 유년의 해를 만날 수 있을 거 같다고. 바람에 실려오는 짠내 나는 공기와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마음속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Life goes on.  귓가에 머물던 라디오 멘트가 가슴으로 내려가 심장을 뛰게 했다. 그 말이 주는 위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하는 결심인지 모를 용기가 부풀어 올랐다. 해가 놓아 버린 짧았던 아픔의 생(生)을 나는 질기게 물고 늘어질 거라는 오기 같은 용기로 입술을 깨물었다. 


Most easterly point of the Australian Mainland (호주 최동단)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동쪽 땅끝에 도달해 등대 앞에 차를 세웠다. 등대는 여명을 알리는 신호처럼 서 있었다. 광활한 호주땅에서 제일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 태양은 곧 이글거리며 바닷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듯 떠오를 것이다.

‘물안개를 순식간에 거둬들이며 떠오르던 이장님의 태몽 속의 그것과 이 태양의 떠오름이 닮아 있겠지.’  

나는 등대 앞에 앉아 땅끝의 태양을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미세하게 빛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하늘의 검푸른 색조가 서서히 연해졌다. 지평선 너머에서 먼저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뺨을 스치고, 파도는 바다의 소금기를 실어 나르며 끊임없이 몰려왔다. 


잠깐 동안 세상이 멈춘 듯 느껴졌다. 하늘은 차츰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고, 해변의 모래 위로 부드럽게 물결이 밀려와 속삭였다. 등대의 불빛이 여전히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지만, 곧 떠오를 태양이 그 빛을 압도할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였다. 하늘이 서서히 주홍빛과 금빛으로 물들어 갈 때, 태양의 첫 줄기가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며 온 세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바다는 금빛을 띤 파도로 춤을 추듯 빛났고, 차가웠던 새벽 공기에도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오랫동안 일출을 보고 있던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벽조목을 바닷속으로 던졌다. 미신처럼 믿어왔던 내 행운의 수호신, 파도가 벽조목을 감싸고 붉은 태양을 머금은 바다 저 멀리로 밀려갔다. 고요하고 평온한 움직임이었다.


* 불멸이

모든 고통모든 눈물

모든 두려움과 울림을 휩쓸어 버리고

깊은 곳에서 울리는 영원의 천둥소리처럼

 귀에  진리 외치는 것을 느끼네

너는 영원히  것이다.


서른 장 남짓의 맨 마지막 해의 유서에 적힌 시를 기억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땅끝의 태양은 이미 바닷속에서 떠올라 눈부신 햇살을 쏟아내고 있었다. 파도와 바람도 조용히 햇살을 빨아들였다.


(*바이런 시의 Manfred의 일부)



'비밀을 푸는 고백'을 마치며 

 

어느 소행성의 작은 별이 된 스물일곱의 J.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영원히 젊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친구. 가끔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지만, 그런 상상은 언제나 불완전한 공허감으로 끝이 난다. 이 소설에서 '해'를 탄생시킴으로써 나는 J가 활자로라도 영원히 살아있기를 바랐다. 이제 나는 J에게도, 해에게도 안녕이라는 인사를 한다. 심연의 공간에 짙은 그리움을 저장해 놓은 채로.


브런치 구독자 여러분, 다듬어지지 않은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12화 비밀을 푸는 고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