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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빠리 Sep 06. 2024

이방인

그녀와 나는 이방인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예민해하지 않기, 인내하기, 감정에 연연하지 않기….. 마약과 알코올중독, 가정폭력에서 방치되고 버려지는 아이들,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세상과 단절된 채 아슬하게 삶의 끈을 잡고 있는 사람들,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한 지적장애인 등,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아동보호(Vulnerable Child Protection)와 장애인복지(NDIS) 일을 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불문율처럼 되뇌기 시작한 몇 가지 규칙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케이스를 배정받을 때마다 쇠뇌했음에도 불구하고 간혹 아린 마음이 태풍처럼 훅 몰아치기도 했고 어떨 때는 칠정(七情)이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전에 주책없이 눈물이 먼저 쳐들어 오는 경우도 있다. 어떤 상황에도 관조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사적인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사실’ 만을 토대로 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관련기관에 보내는 것에 내 직업이지만 처절한 상황에 직면할 경우, 불어난 장마물에 떠내려가는 통통배처럼 나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때마다 내 안에서 파도를 타는 높고 낮음의 복잡한 감정들은 감출 수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쳐들어온 적군 같은 눈물은 화장을 지워버리면서 삐에르 같은 우스운 꼴을 연출하기 일쑤였다. 그날도 그랬나 보다. S를 만나고 M4 (고속도로)를 거쳐 시속 100KM로 액셀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러 갈래의 눈물이 차가 내는 속력보다도 더 빠르게 얼굴을 덮었다. 


모처럼 평일에 즐기는 휴무, 그날 아침은 늦게까지 침대에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정오가 다 될 무렵쯤 기지개를 켰다. 커피를 마시면서 베란다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정말 급한 케이스예요. 담당자가 오늘 교통사고가 나서 일을 할 수 없는데 클라이언트가 계속 울면서 전화를 해요. 꼭 누군가가 와 주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고 있어요.” 

아, 제기랄. 어쩐지 전화 소리가 요란하더라니. 마시던 커피잔을 탁자 위에 던지듯이 올려놓았다. 그 순간, 디오게네스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아무리 세상 최고의 권력을 가진 알렉산드로스대왕이라도 디오게네스에게는 일광욕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였을 뿐. 나의 해바라기는 채 십 분을 넘기지 못했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오만하게 그날 오후를 즐기리라던 행복감은 단박에 바람 빠진 풍선이 돼버리고 만다. 전화를 걸어온 담당 매니저한테 거리가 너무 멀다는 핑계를 앞세워 최대한 예의를 갖춰 거절을 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반복되는 그의 ‘Desperate (절박)’ 이란 표현에 마지못해 오우-케이,라고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지는 듯한 승낙을 하고야 말았다. 


Kingswood(킹스우드)로 가는 길, 은빛 가루 같은 햇살이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 길이 Palm Beach(팜비치)나, Wollongong (울릉공) 해변 대로로 가는 길이라면…..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핸들을 꺾어 방향을 바꾸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로 하늘이 파랗고 화창한 겨울 오후였다. M4를 벗어나 Kingswood라는 이정표가 나타나자 갓 길에 차를 세웠다. 서둘러 집을 나서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이번 케이스에 대한 정보를 읽어보기 위해서였다. 장기적인 정신질환으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38세의 S라는 여자와 함께 점심 식사하기, 원하는 장소에 동행해 주면서 세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임무이다. 외출하기 전에 샤워를 했는지, 옷을 갈아입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특히 주의 사항으로 빨간 글자로 표기 돼 있었다. 보통 첫 대면에 이름과 성을 확인하기 때문에 나는 여자의 이름을 몇 번 소리 내어 중얼거려 보았다. 도착지에 다다랐을 때 두 개의 가방을 양쪽 어깨에 메고 앙상한 가로수 앞에 서 있는 동양 여자를 보았다. 차를 세우고 주택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녀가 말을 건넸다. 

“저는 S 예요. 와 주셔서 감사해요. 한 시간을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의 이름만으로는 전형적인 호주인일 거라는 예상을 했었는데 의외로 키가 작은 동양인이었다. 체구가 작은 여자는 자신의 무게보다 더 나갈듯한 두 개의 가방을 어깨에 맨 채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예정에 없던 스케줄이라 급하게 오느라 기다리게 했군요. 미안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이민자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하는 말이 잘 이해가 안 간다면 반복해 달라고 말해주세요.”

악수를 하고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면서 내 발음이 원어민처럼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도 더불어 알려주었다. 간혹 클라이언트를 방문하면 표정부터 어두워지고 인사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백호주의 사상이 아직도 머리에 꽉 차있는 몰지각한 백인들, 자신들보다 열등한 동양인이 본인들을 감시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다. 그들은 동양계 이민자들이 싫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 대신 ‘악센트’ 때문에 불편하다, 말을 잘 이해 못 하겠다는 식의 우회적 표현으로 나 같은 유색 이민자들을 꺼려하기도 한다. 

외계인이라도 난 좋아요.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라면서 나의 염려와는 달리 S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양쪽 볼에 보조개와 가지런한 치아 때문인지 그녀의 웃는 모습이 매우 매력 있게 보여서, 웃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칭찬을 했다. 내 칭찬이 끝나자 그녀는 더 크게 웃으면서 ‘I’m Korean too’.라고 하더니 내 반응을 살폈다. 그녀가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다시 한국말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태어난 지 6개월 됐을 때 호주로 입양 왔어요. 호주 엄마, 아빠 그리고 언니, 오빠랑 Canberra (캔버라) 근처 지방에 살다가 대학 입학하면서 시드니로 왔죠. 한국말은 전혀 못해요. 그리고 한국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요. 그러나…분명한 것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녀는 중간에 ‘그러나 (But)’를 말하면서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 정작 그녀는 입양이란 말을 덤덤히 표현했지만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OK라고 해야 할지, I see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Understand라고 해야 할지,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애꿎게 손거스러미만 뜯고 있었다. 그 사이 그녀의 얼굴에 귀엽게 팬 보조개도 사라지고 하얀 치아도 굳게 닫힌 입술 뒤로 가려졌다. 호주에서 한국인 입양아를 만난 건 처음이라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국인 입양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전쟁고아나 1960,70년대, 한국의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을 때 미국이나 유럽의 부유 나라로 입양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티브이를 통해 본 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먼 나라로 입양됐던 아이들이 성장해서 다시 한국을 찾아와 자신들의 혈육을 찾는 다큐멘터리를 보았고 그때마다 부끄러운 한국의 역사를 탓하거나 입양아들에게 느끼는 연민보다는, 저들도 연어처럼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내 복잡한 감정의 엉킴과 어정쩡한 제스처를 S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잠시 잊고 있던 임무에 착수했다. 

샤워는 몇 시에 했는지, 옷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아침에 일어나서 나를 만나기 전까지 무엇을 했는지 등등, 나의 사무적인 질문이 이어지자 그녀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또박또박 답을 했다. 두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난 그녀에게 우선 점심 식사를 권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난 후 S는 내게 지역 도서관에 함께 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어디든 그녀가 원하는 곳이면 내가 동행해 주겠다는 말을 하자 그녀는 아무도 자신에게 이토록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녀는 내 손을 살짝 만지면서 ‘ Much appreciated (대단히 감사합니다)’를 두 번이나 반복했다. 

그녀가 도서관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두 개의 가방에 꽉 차 있던 책들을 반납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차 트렁크에 놓고 내리길 원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 책들은 도서관에서 대여한 것이 아니라 전공 서적들이라 본인이 구입한 것이라 했다. 그녀가 준 두 개의 가방을 들어 트렁크 안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으면서 슬쩍 내용물을 살폈다. 모두가 두꺼운 의학 서적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지금 가장 걱정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몇 권의 어려운 책을 빠른 시일 안에 끝내고 싶은데 못 할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말했다. 어려운 책들이 의학 서적이었군요,라고 내가 트렁크를 닫으면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내 옆에 바짝 붙어 마치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낮게 속삭였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지만 아직도 끝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자신의 머리를 출입하면서 수면을 방해하고, 식욕을 떨어뜨렸고 더불어 모든 일상생활이 힘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는 그녀의 필수품이 되었다고 했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그녀는 나를 컴퓨터 앞으로 이끌었다. 

“나에게 한국을 보여주시겠어요? 무엇이든 한국에 대해 당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르쳐 주세요. 난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한국의 지도, 한옥, 한복, 풍악놀이, 김치, 광화문 사거리와 한국의 사계절 사진들을 찾아 설명을 보태면서 보여 주었고 인사말 등 몇 가지 한국말을 가르쳐 주었다. 흔히 공개 입양을 하는 서양 사람들 같은 경우, 입양해 온 자녀의 출생지에 대한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S는 그녀의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김치도 먹어 본 적이 없고, 한복을 보더니 인도 사람들이 입는 사리 같다고 말했다. 태어난 곳에서 버려져 Canberra(캔버라)에서도 두 시간은 족히 떨어진 호주의 오지로 입양 온 그녀의 삶이 순탄치 않았겠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한국의 울긋불긋 단풍이 든 시월의 비경을 보면서 그녀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만약에 내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한국 사람들은 나를 한국인으로 대해줄까요?  아니면 그저 관광객이라고 생각할까요? ,라고 그녀가 대뜸 물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목이 메워오는 것도 같았다.

“당신 스스로 나에게 한국 사람이라고 말했잖아요. 한국에 가서도 오늘 당신이 내게 말한 것처럼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면 누구든 당신을 반겨 줄 거예요. 언젠가 당신이 그곳에 꼭 갈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이면서 애써 웃으려 했다. 

“ 혹시 내가 한국에 가고 싶어 했거나 친부모를 찾으려고 시도해 보았나 하는 것들이 궁금하지 않나요?” 
 사실 그녀가 한국 입양아란 말을 듣는 순간부터 입가에 맴돌던 궁금증이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무안해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굳이 그리움을 맘속에 쌓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 어쩌면 친부모님이나 내가 태어난 곳을 알아가는 것보다 이곳에서 흡수되어 살아가는 게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던 거 같아요. 나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없는 곳에서 전혀 닮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호주 사람처럼 살아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이방인 같았어요. 어릴 땐 천사들이 있다는 걸 믿었어요. 그래서 늘 기도하면서 잠이 들곤 했죠. 나를 양부모님, 언니나 오빠처럼, 그리고 이웃 사람들처럼 하얗게 만들어달라고. 그럴 때마다 내 검은 머리가 급속하게 자라 주위 사람들을 꽁꽁 묶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었어요. 몇만 번을 기도해도 천사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또래들은 나에게 ‘Yellow(황색 아시안을 이르는 속어)’라고 손가락질하며 웃어 대곤 했죠. 엠퍼러 펭귄은 아기 펭귄을 먹이기 위해 이주 동안 긴 여정을 하면서 힘든 먹이 사냥을 한대요. 그리고 아기 펭귄이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위험으로부터 철저하게 지켜준다는군요. 경이롭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오랫동안 혼란스러웠어요.   마치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영원히 정지 상태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코리아, 아주 아름다운 곳이군요. 만약에 내가 그곳에서 따뜻하게 보호를 받다가 내 의지대로 떠나왔다면 지금쯤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녀가 마우스를 굴리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의 입속에서는 ‘코리아, 난 그곳을 내 의지대로 떠나왔는데도 아직도 안개속을 걷는 듯해요.’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다. 내 인생에도 분명 갓림길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때가 있었다고, 어느 누구에게나 꼭 견딜 만큼의 고통만 온다는 관습적인 말에 반기를 들고 싶을 정도로 가슴을 움켜쥐며 절망스러운 하루를 버텨 내던 시간들, 나도 그녀처럼 이 넓고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이 느낄 수 있는 몇 천 가지의 두려움과 더불어 아무 때나 밀려오는 외로움과 사투해야 했었다고, 그녀가 내게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한 것처럼 나를 확 열어 보이고 싶었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그녀를 옭아매었던 위협적인 고독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사적인 대화는 직무유기이다. 동정과 공감보다는 고무를 목적으로 지원을 나온 이상, 그 어떤 순간에도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연결해서 대화를 시도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내 임무임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우두커니 그리움을 방관하고 억제한다면 골은 깊게 파이게 마련이에요. 시간에 비례하여 깊어지는 공간을 메우려면 지나온 시간만큼 역행해야 하는 게 이치라고 생각해요. 무엇이든 본인이 원하는 것, 하고 싶어 했던 것, 그리고 보고 싶어 했던 것들을 감추지 말고 퍼즐 맞춰나가듯 한 조각씩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다 보면 당신이 끝내지 못한 저 두꺼운 서적들도 언젠가는 마스터하게 될 거예요.” 

지극히 상투적으로 독려하는 내 말에 그녀는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간격을 두어 ‘Thank you’라고 말했다. S는 모니터 스크린에 가득 차 있는 사진들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마치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듯 손을 들어 바이,라고 하면서 스크린을 껐다.


S와 보낸 세 시간은 찰나처럼 느껴졌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만나요,라고 하자 그녀가 다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려 했다.  난 어쩐지 악수보다는 그녀를 포옹해 주고 싶어서 그녀의 어깨를 두 팔로  감쌌다. 내가 차 안으로 들어와 시동을 걸었을 때 그녀가 창문을 내려 달라는 시늉을 했다.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주어서 감사해요. 앞으로 한국말을 배워 보고 싶어요. 다음에 만날 땐 꼭 한국말로 인사할게요.” 

S는 내가 그녀를 만나러 왔을 때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서서 내가 가르쳐준 감. 사. 합. 니. 다를 아주 어렵게 발음했다. 무거운 두 개의 책가방은 발꿈치에 내려놓았으나 한 손으로 가방끈을 잡고, 다른 한 손을 계속 흔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백미러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천천히 운전을 했다. 그녀는 겨울나무 앞에서 내 차가 코너를 돌아 큰길로 들어설 때까지 꾀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M4에 들어서자 갑자기 마음이 서늘해졌다. 손을 흔들고 있는 S의 모습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고속도로위에 오버랩됐다.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으면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일까. 어쩌면 말똥 한 정신으로 이 세상의 시련들과 부딪힐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큰언니처럼 더 따뜻하게 안아 주고 작별할걸, 너무 사무적이게 대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와 더불어 외계인이라도 곁에 있으면 좋다고 웃던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네 삶 어느 단계마다 그에 상응하는 괴로움이 동반한다. 성장통을 지나면 세상의 모든 것에 이유 없이 반항하고 싶은 사춘기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고뇌하는 청춘을 지나고 나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방황과 절망. 나는 S가 이런 징후들을 통과의례처럼 거쳐 멋지고 성숙한 한 인간으로 치유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이 겨울이 지나고 봄비가 내린 후에는 그녀 뒤로 서 있는 스산한 나뭇가지마다 무수하게 파릇한 잎사귀들이 얼굴을 내밀 것이다. 찬란한 초록으로 물든 나무 밑에서 S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기를, 그녀가 시작하지 못한 퍼즐들이 완벽한 그림으로 완성되기를, 그리고 그녀의 상처에 따뜻한 온기가 봄 햇살과 더불어 찾아오길….. 이런 기도를 하는 사이에 더 짙은 어둠이 세상을 덮었고 전조등을 킨 수많은 차량들이 제 갈 길에 부산하게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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