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롱골 가는 길
삶을 견디어 낸 우리들의 길, 영혼이 쉬는 길
오 년 동안 미뤄오던 귀국 일정을 서두르게 한 건 엄마의 힘없는 목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바쁜 건 알지만 한 번 다녀가야 하지 않겠냐,라는 엄마의 음성은 둔탁했다. 여간해서 이래라저래라 타박을 하지 않는 엄마였기에 다녀가라는 그 한마디에 마치 딱밤을 세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든 후반의 아버지가 혈액암 치료를 받은 지 반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나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었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병원 생활이 어떤지, 식사는 제대로 하는지 등의 소소한 안부만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처음 아버지의 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얼마간 울기도 했었지만 그런 후에는 시나브로 일상에 묻혀갔다.
오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여전히 고즈넉했다. 저수지 둑 밑에 삼십여 채의 작은 집들이 하천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 끝자락에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덮고 있는 나의 집. 반색을 하며 무거운 가방을 들어줄 엄마가, 독한 항암치료로 심신이 고단한 아버지가 그 집에서 오 년 만에 귀국하는 딸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대문 앞에 서 있는 부모님을 본 것은 내가 탄 택시가 신작로를 돌아 집으로 향하는 갓 길로 접어들 때였다. 산골의 저녁 바람이 아직 싸늘할 텐데 타국에서 오는 딸을 맞이하기 위해 얼마나 오래 저렇게 서 있었던 것일까. 나는 유리창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저 왔어요,라는 짧은 인사만 하고 뒷말을 잇지 못한 건 지난 오 년 사이 변한 두 분의 모습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민둥산 같은 머리, 퀭한 눈, 마른 장작 같은 몸. 아버지야 고된 암치료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엄마의 주름과 피곤이 쌓인 눈가, 곱은 손매듭과 거친 살결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세월이 두 분의 얼굴이며 온몸 구석구석에 잔인한 흔적을 남기고 지나갔구나!
도시 문명의 수많은 유혹, 인터넷으로 보는 세상과는 매일 소통을 하면서도 정작 돌봐야 할 노부모는 멀리 산다는 것을 핑계로 외면해 온 천하의 몹쓸 인간이 된 꼴이라니. 노부모는 그런 자식의 여독을 걱정하면서 저녁 상을 차리느라 분주했다. 그래 여간 먼 길이냐, 힘들게 오느라 고생했구먼, 일하느라 힘들 텐데 그냥 집에서 쉬지 뭐 하러 와,라고 아버지는 연신 맘에 없는 말을 간헐적으로 토해냈다. 아이고 이 양반이 웬 내숭여, 안 온다고 밤마다 구시렁거릴 땐 언제고,라는 엄마의 핀잔이 냅다 아버지의 미소에 꽂혔다. 내가 언제 그랬누, 겸언쩍은 아버지의 응대와 함께 눈이 찡긋하고 엄마를 향했다. 죄송해요, 진즉에 왔어야 하는데… 나는 또 변변찮게 핑계를 대려다 그만두었다.
노부모와 함께한 저녁상은 타국에서 혼자 먹는 저녁상과 달랐다. 그건 아침부터 준비했을 엄마의 정성이나 반찬 때문만이 아니었다. 포근함이었다. 쫓기는 듯 허겁지겁 살다가 고향 냄새, 집 냄새, 엄마 냄새가 전해주는 평온함과 안도감이었다. 오래간만에 노부모와 함께한 저녁상을 치우고 난 뒤에 과일 담은 접시를 중간으로 엄마와 마주 앉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귀국하기만 하면 여기저기로 친구들 만나러 다니느라 정신없을 텐데, 낼 아침에 일찍 도롱골에 다녀오자, 꼭. 톤이 낮은 엄마의 목소리가 긴 침묵을 깼다. 아버지는 이미 머리를 떨어뜨리고 소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마을에서 족히 십 리 길은 되는 도롱골. 겨우 자전거나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산골 길을 따라 들어가면 그 끝자락에 선산이 있다. 종갓집 맏며느리인 엄마에게는 조상을 모시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었다. 아직 출가를 안 한 딸이 조상님께 인사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의중을 잘 알지만 어쩐지 ‘꼭’ 가자는 엄마의 강조에는 다른 뜻이 내포된 것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작년에 돌아가신 숙부의 산소에 늦게라도 인사를 하라는 것일까. 엄마는 피곤하더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아직 어둠이 다 걷히지 않은 새벽부터 엄마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산소에 가져갈 간단한 제 상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바람막이를 입고 엄마의 뒤를 따라나섰다. 봄이면 취나물, 고비, 고사리, 두릅 등 산나물을 캐고, 한 여름엔 어느 집 참외 밭에서 슬쩍 서리를 하며, 가을이면 산밤, 보리수를 훑으러 다니던 길. 도롱골로 가는 길에서 유년의 나를 만난다. 뙤약볕 아래서 밭일이 하기 싫어 어찌 꾀를 부려 일을 빨리 끝내나 하고 엄마의 뒤 꽁무니에서 잔꾀를 부리면서 걷던 길이 도롱골로 이어져 있다. 그럴 때면 빨리 오라는 엄마의 재촉에 짜증스럽게 깡을 부렸었지. 그 시절을 추억하며 걷는 지금은, 자꾸만 저만치 뒤처지는 노모의 작은 체구를 뒤돌아본다. 여든의 노모는 앞서가는 딸이 행여나 가시풀에 다리가 상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천천히 가라는 엄마의 숨찬 소리에 잠시 멈추어 섰다. 딸의 걸음이 빠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걸음이 느려졌다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 듯, 한 참 때는 수 십 번 오가던 이 길도 이제는 힘이 부친다,라고 중얼거렸다.
증조부모, 조부모 묘에 순서대로 절을 했다. 엄마는 하얀 편지 봉투를 꺼내 묘비석 앞에 올려놓았다. 그 봉투 안에는 몇 장의 지폐가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조상님께 올리는 엄마만의 유일한 감사 표현이었다. 자손들을 건강하고 평화롭게 지켜주시옵소서, 엄마의 간절함은 산소에 웃자란 잡초들을 뽑아내면서도 계속되었다. 숙부의 산소에 재배를 한 다음에 엄마는 나를 선산의 윗자락으로 이끌었다. 거기엔 잔디가 없는 벌거스름한 묘지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여기다, 니 아버지랑 내가 들어갈 곳이야. 손주들 크는 걸 보면 딱 십 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구먼, 사람 명이 늘리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꽃이 피고 지듯이 운명처럼 받아들여야지. 키울 땐 끝나지 않을 고생 같더니 다 키우고 나니 자식 많은 것도 조상이 준 덕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남들이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법이라고 야유를 보내도 나는 니들 육 남매를 낳아 키웠다는 걸 어디 가서 든 제일 자랑하고 싶어. 가난 때문에 너희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게 아쉽고 미안하지만 그래도 기특한 내 새끼들이 일하면서 공부해서 지금은 다들 제 몫을 하면서 살고 있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
엄마는 마치 금세라도 가묘 안으로 들어갈 듯한 어조였다. 가묘를 보고 있던 나는 마치 죽음의 사자를 독대한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소변을 보고 온다는 핑계를 대고 급하게 그 자리를 떠 산 비탈길로 향한 것은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언젠가는 저 가묘가 정식 분묘가 될 날이 올 것이다. 엄마의 표현대로 때가 되면 하롱하롱 지는 꽃잎들처럼 내 부모의 삶에도 낙화처럼 소리 없는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가묘를 마련한 것은 그때가 멀지 않았음을 감지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신들이 가신 후에 자식들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함임을 난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으레 때가 되면 어련히 잘 알아서 안 할까, 무슨 조급 함이냐고 어른들의 생각에 생떼를 부리고 싶은 맘을 한 껏 누르고 엄마의 어깨를 슬쩍 껴안았다.
“엄마, 햇볕이 오래 들고 저수지 풍경이 훤히 보이네요. 엄마랑 꽃나무 심으러 와야겠네. 엄마가 좋아하는 연산홍을 묘 둘레에 가득 심으면 어때? 엄마는 꽃잔디도 좋아하잖아.”
나는 애써 밝은 척하면서 오래 사시라는 말 대신 매 해 이맘때쯤 꽃나무를 같이 심자는 말을 했다. 시집은 안 가고 꽃나무만 심으러 다 닐려, 하면서 눈을 흘기는 엄마의 옆모습이 쓸쓸해 보였던 건 왜였을까.
언젠가 큰언니가 엄마한테 노년 우울증이 온 거 같아,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국제전화를 했을 때가 생각났다. 엄마의 팔순 잔치가 있던 날, 친인척들의 덕담을 들으면서 다른 건 염려 안되는데 내가 혼자 사는 게 젤 걱정이라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더라는 것이다. 그 축제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애처럼 울고 난 엄마가 오색의 음식엔 눈길도 주지 않고 넋 나간 듯 오래 앉아 있기만 했더란다.
“엄마, 나 혼자 있는 거 걱정 안 해도 돼요. 엄마도 알다시피 난 혼자 있어도 심심해하거나 쓸쓸해하지 않는데 뭘. 그림 보는 것도 좋아하고, 화초 기르는 것도 쏠쏠한 재미구, 옛날 레코드 듣는 걸 연애보다 더 좋아하잖아요. 오히려 누군가 같이 있으면 좋아하는 것들 못해서 병날지도 몰라요.”
난 엄마를 위로했다. 불효라고 생각하지 말고 딸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달라고. 그러면서도 맘 한 켠에서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사는 모양을 보여주지 못한 미안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엄마는 가묘 앞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저 여인의 삶은 오죽이나 신산했으랴! 나는 엄마 옆으로 슬쩍 다가가 엄마의 어깨를 감쌌다. 엄마는 제를 지내고 남은 소주 한 잔을 내게 내밀었다. 하얀 술잔 사이로 엄마의 주름진 손등이 서글퍼 보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한테 받아본 술잔이었다. 워낙 술이 약한 집안의 내력으로 인해 우리 가족 모두는 술 먹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나는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엄마에게도 한 잔을 따라 건넸다. 엄마도 단숨에 한 잔을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내 볼에 발그스레 취기가 올라왔다. 엄마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엄마의 등 뒤로 은빛 잎사귀 안에 자색 꽃을 품고 여기저기서 할미꽃이 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눈부신 봄 햇살이 만연한 도롱골. 오직 내 고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청초한 햇살이었다. 아득히 멀어져 간 유년, 그리고 내 부모의 땀과 사랑이 그 길을 통해 아지랑이처럼 아물아물 피어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