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고르는 시간

순간의 감정들을 잊지 않는 방법

by 녹지

“엇 이 향은..”하고 추억에 잠겼던 순간이 있다면.


한 여름 저녁, 집에서 더위에 허덕일 때면 늘 할머니께선 언니와 나의 손을 잡고 집 앞 5분 거리의 동네 빵집으로 나서곤 했다. 빙수 하나와 빵을 골라 시원한 빵집 에어컨 아래에서 함께 먹고 있으면, 얼른 빵집을 나서고 싶을 정도로 온몸이 추위에 덜덜 떨리곤 했다. 빙수를 먹고 온몸이 시원해진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청량한 여름밤 공기와 얕은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무의 냄새는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여름밤 나무와 풀의 냄새를 맡으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여름이 지나,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가슴이 뻥 뚫리는 선선한 가을 향기를 맡으면 늘 ‘멜로가 체질’ 드라마가 떠오르곤 한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 라는 봄 노래로 유명한 드라마지만, 선선한 가을 향기가 느껴질 때 보았기 때문인지, 가을 향기만 맡으면 그 드라마를 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처럼 특정한 향을 맡으면 떠오르는 순간들과 감정들이 있다. 잉크에 힘을 주고 꾹꾹 진하게 써 내려갔던 일기장의 기록보다, 때로는 그날 맡았던 향의 기억이 더욱 진하게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단순히 그날의 기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향과 기억이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일까.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작가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에서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용어가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내는 현상을 의미한다.


실제,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에 바로 연결되어, 냄새가 감정과 기억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일기장을 들춰보고 떠올렸던 기억들보다 우연히 맡게 된 향을 통해 과거의 감정과 추억을 떠올리게 된 순간들이 더욱 많았다. 매일 꾸준히 일기를 쓰는 것은 많은 노력을 동반하는 일이기에, 귀찮을 때면 그날의 감정보다 그날의 일과 사건들을 나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일기장을 열어보면 그날 있었던 일은 조금이나마 기억하지만,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기억하기 어려웠다.



나의 두 번째 기록, 차


그래서 이용하는 나의 두 번째 기록은 바로 ‘차(茶)’다. 나의 집 한편에는 많은 종류의 티백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많은 티백 중 그날 마실 차를 고르는 기준은 바로 ‘오늘 하루의 기분’이다. 오늘 하루의 기분이 어땠는지에 따라, 그날 마실 차가 결정되는 것이다. 마치 그날의 기분에 대한 진단과 처방전이 내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하루가 아주 특별하고 행복했을 땐, 몽크 블렌드 티

달달한 디저트와 함께 충전이 필요한 힘든 날엔, 얼그레이 티

평범한 날이지만 소소한 웃음이 있었던 날엔, 다즐링 티


KakaoTalk_20210328_230707201.jpg

몽크 블렌드 티를 특별하고 행복한 날에만 마시는 이유는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기 때문이다.

달달하고 상큼한 향이 나면서도 기분 좋은 따뜻함이 느껴지는 이 차는 아무날에나 쉽게 꺼내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차라면 이것만 마시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이 차를 마실 때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아주 아끼고 아껴 마시는 차다.

그러나 때로는 예외도 존재한다. 오늘 하루가 매우 우울했던 날이거나, 행복했던 그날의 기억을 꺼내 떠올리고 싶은 날에는 몽크 블렌드 티를 꺼내 그 향에 넣어둔 행복한 추억들을 꺼내보곤 한다.



감정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


<강신주의 감정수업>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죽이는 기술을 얻었다는 것 아닐까요? 매사에 일희일비하면 너무나 피곤해지는 것, 혹은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면 불이익을 받기 쉬운 것이 사회생활이자 가정생활이니까요.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다음부터는 별로 기억나는 추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억은 감정이 있는 자리에 존재한다. 어릴 적 기억을 돌아보면, 작은 것에도 설레고, 슬퍼하고, 화를 냈던 기억들이 있다. 감정을 숨김없이 모두 표현했기에 그만큼 떠오르는 기억들도 다채롭게 존재한다.


그러나 어른이 된 이후,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숨기게 되었다. 책에서처럼, 솔직히 표현하면 불이익을 받기 쉬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기기만 한다면 어른이 된 이후에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았을 때, 남은 기억들이 그리 많지 않다면 그것은 참 무서운 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어른이지만, 조금 더 다채롭고, 생동감 있는 세상 속에 숨 쉬며 살기 위해서는, 오늘 느꼈던 내 감정을 기억해 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차를 고르는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그날의 내가 느꼈던 감정을 돌아보며 오늘 꼭꼭 숨겨뒀던 감정들을 잡아주고 기억해주는 것이다. 오늘 표현해내지 못하고 눌러 담았던 감정들을 꺼내 찬찬히 살펴보고 오늘의 감정에 어울리는 차를 우려준다.


적어도 감정의 주인인 나는 그것을 기억해 주기 위해, 나는 향의 도움을 받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별똥별 발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