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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Feb 02. 2021

커피 대신 파르페를 골랐어야 했는데.

1일 1 페이지 클래식365를 읽고.

오빠랑 나는 두 살 차이다. 중학교 때 오빠 친구 A를 짝사랑했었는데, 그는 내가 코흘리개 시절부터 봐 온 사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를 보면 고장 난 가슴처럼 가슴이 찌르르 떨렸다.슬프게도 그의 가슴은 멀쩡했다.


나는 그가 집에 놀러 오는 날에는 번개처럼 방으로 뛰어들어가 아껴 둔 외출복을 꺼내 입었는데, 눈치라고는 벼룩의 간만큼도 없는 울 오빠는 집에서 왜 그렇게 입고 있냐고 나를 타박했다. 눈치를 초등학교 때부터 필수과목으로 넣었으면… 바람을 가져본다.
  
오빠가 다른 도시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그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3년여가 흘렀다. 고2 토요일 오후, 학교를 마친 나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걷다가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아니 훨씬 더 멋있어 보였다. 오랜만에 나를 본 것이, 그도 반가웠는지 파르페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땐(80년대 중후반) 파르페 하면 커피숍에서 파는 최상의 메뉴였다. 슈퍼에서 12시에 만나자는 (브라보) 콘을 사줘도 감지덕지할 판인데 파르페라니, 나는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근처 음악다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내가 좋아하는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가 흐르고 있었다.

설탕 가루처럼 흩어진 내 마음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왔고, 그는 커피를 주문했다. 나는 마땅히 파르페를 주문하면 됐을 것을 그 순간 괜히 '으른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 나도 모르게 "저도 커피 주세요"란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는 순간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침착한 어른의 얼굴로 부모님 안부를 물었다. 나는 외국영화 더빙에서 나오는 약간 느끼하고 성숙한 목소리로 부모님과 가족들의 안부를 전했다.
  
이윽고 웨이터가 다가와 블랙커피 두 잔과 설탕, 프리마가 든 쌍둥이 병을 내려놓았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커피를 마셔보지 않았다. 그래도 본 것은 있으니까 침착하게 티스푼을 들고 프리마 두 개와 설탕 두 개를 넣고 세련된 도시 여자처럼 커피를 홀짝이면 되었다. 경로우대 정신에 입각해 오빠가 먼저 간을 맞추도록 기다렸다.
  
드디어 내가 티스푼으로 설탕을 뜨려는데, 그가 나를 빤히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떨렸던 가슴이 팔을 타고 내려와 손이 벌벌 떨렸다. 티스푼에 올려진 설탕들이 테이블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떨어진 설탕 옆으로 내 창피함이 함께 나자빠져 있었다. 티스푼이 내 잔에 도착했을 때 설탕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아직 설탕 한번과 프리마 두 번이 남았는데 이를 어쩐 담. 이놈의 티스푼은 왜 이렇게 작은 것이냐! 파르페를 시킬 걸, 이게 무슨 망신이냐! 속으로 절규하며 몇 알갱이 되지도 않은 설탕이 든 커피를 계속 젖자 그는 내 잔을 가져다 나머지 간을 맞춰주었다. 아… 이 세상 창피가 아니다. 그럴 때 저혈당이란 그럴싸한 말이라도 떠올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평소에는 그렇게 애드리브를 쳐대더니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눈앞만 캄캄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잔을 드는데, 또 손이 벌벌. 그는 나를 보며 싱긋 웃더니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난 망할 커피를 원샷했다. 그가 돌아오는 동안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데 그제야 안 들리던 음악이 들렸다. 브람스 무곡 1번이 흐르고 있었다.

곡은 마치 드라마 하이라이트의 OST처럼 내 웃픈 비극을 더 극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대책 없이 서툰 나를 향해 웃는 웃음 같았다. 그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이윤학의 시 이미지 중)
  
우리 집은 이사했고 오빠에게 가끔 그의 안부를 듣긴 했지만, 이후론 그를 보지 못했다. 브람스 무곡 1번은 테이블에 떨어진 설탕 가루처럼 촘촘히, 어설프고 창피하게 내 마음에 박혔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어떤 음악을 들으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거나 어떤 추억이 떠오르는 거. 이 곡이 내게 그런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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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1 페이지 클래식 365.

ⓒ 도서출판 사우


추억까지 소환해주는 클래식 종합세트


얼마 전 '1일 1페이지 클래식 365'란 책이 나왔다. 책을 들어 딱 폈는데, 브람스 무곡 1번이 10월 3일 날짜에 QR코드와 함께 나와 있었다. 난 추억을 떠올렸고 애처로운 웃음이 나왔다.


휴대전화를 대고 QR코드를 찍어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페이지들도 살펴보았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365페이지로 한 장 분량의 글과 음악이 소개되어 있었다. 곡마다 작곡가의 사연이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그뿐 아니라 저자의 사연, 시대의 사연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종합선물 세트처럼 빽빽하게 들어있다.


< 번지 점프를 하다>란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쓰인 쇼스타코비치 왈츠도 곡의 창작 배경에 관한 설명과 함께 나와 있었고, <밀회>란 드라마에 유아인과 김희애가 연주했던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 단조>도 있다.

전 국민을 비탄에 빠트린 4월 16일에는 가곡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가 나와 있었다. 가사를 쓴 독일의 시인 뤼케르트는 성홍열로 두 아이를 잃고, 매일 눈물로 시를 썼는데, 그 시 중 5개에 말러가 곡을 붙여 탄생한 노래가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다.


"나는 생각하지, 아이들은 잠깐 놀러 나갔을 뿐이야. 햇살 화창하니 걱정하지 말자, 아이들은 잠깐 산책을 간 거야. 저 언덕 너머 잠시 여행 중이니 나보다 조금 앞서 걸어가고 있으니 아직 집에 올 생각을 안 하는 게지." "간밤의 끔찍한 일을 모르는 듯 태양은 다시 밝게 떠오르네. 재앙은 내게만 일어났는데, 태양은 어째서 골고루 비추는 걸까" (1일 1페이지 클래식 365. P117)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 헨델, 쇼팽, 차이콥스키, 등등 어마어마한 작곡가들의 곡들 사이 우리에게 친근한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란 곡도 들어있고 밸런타인데이에는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센스 있게 나와 있다.


또, 12월 27일 날짜에는 내놓기 부끄러운 이름도 들어 있으니, 바로 나다. 나는 올해 공연 예정인 가극 <아파트>의 가사를 썼는데, 이 곡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책이 나오기 전, 이 부분에 관한 원고를 미리 받아보았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내 이름이 책에 들어있는 걸 확인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클래식에 관심은 있는데 무엇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 곡에 대한 사연을 알고 싶은 사람, 교양을 쌓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유용한 책이다. 휴대전화만 QR코드에 대면 음악이 나오는 이 편한 세상이 아닌가.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곡에 대한 지식도 쌓고, 추억에 잠겨도 보고, 좋았던 영화나 드라마를 떠올려보기도 하면서 지난한 이 시간이 손톱 반달만큼이라도 더 풍요로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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