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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Dec 24. 2018

그녀 나이 47세, 시골마을에 신혼집을 차렸다.

30년 만에 다시 만난 연인-아메리카노를 안 마셔도 행복한 일상.

도서관에서 사서로 오랫동안 일했던 내 친구ㅇㅇ은 내 글의 열렬한 독자이자 비서였고 내가 의기소침할 때마다 응원해주는 치어리더였다. 알고 지낸지는 오래되었으나 가까워진 건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작년 1월부터이다. 매일 자료로 쓸 책 목록들을 그녀에게 톡으로 보내면 그녀는 다음 날 아침, 도서관 내 전용 자리에 내가 필요한 책들을 올려두었다. 그 책상에 앉아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녀는 시간마다 슬쩍 와서 더 필요한 게 있는지를 묻고 때때로 커피를 배달해주었다.  

   

점심시간이면 우리는 주로 도서관 근처에서 순댓국을 먹었다. 국밥을 떠먹으며 그녀는 내가 오늘은 무엇에 대해 쓰는지 스파이가 염탐하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는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 다 꺼내놓았다. 귀를 쫑긋하고 내 얘기를 들으며 큰 깍두기를 한 입에 넣고 우적우적 밥을 먹는 모습이 재밌다. 안 그래도 먹는 속도가 느린 나는 말하느라 반에 반도 못 먹었는데 그녀는 뚝배기를 들어 마지막 국물을 넘긴다. 결국 깍두기 혼자 클리어.     

가끔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써 오곤 했다. 일기검사를 받는 사춘기 소녀처럼 말간 얼굴로 내 반응을 기다린다. 나는 그녀의 글이 좋았다. 조미료 수프 대신 멸치국물에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 국수 같았다. 기교 없고 담백하고 순수했다. 뭔가 첨언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우앙, 좋네.” 내가 말하면 그녀는 실망 반, 안도 반의 희미한 미소를 보내며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택배가 왔다. 열어보니 고구마 순 깐 거 잔뜩 한 봉지와 단호박, 고구마, 말린 고사리가 들어있다. 몇 달 전, 갑작스레 귀농해버리고 내게 농산물 종합세트를 보낸 그녀의 사연은 이렇다.    

 


작년 12월, 정읍에 자리를 잡았다. 알 수 없는 인생이라더니. 골짜기와 낭떠러지를 돌고 돌아 내 나이 47세. 사랑하던 그를 다시 만났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7살 때이다. 그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첫 발령이 난 선생님이었다. 가난 때문에 대학은 꿈도 못 꾸던 내게, 넓은 세상을 들려주며 내가 갈 수 있는 학교를 알아봐 주고 아무런 조건 없이 첫 등록금도 지원해 주었다. 어리바리한 나는 감사의 마음도 표현하지 못했다. 대신 그가 오래도록 내 곁에 있을 거라는 헛된 오해를 ‘나 혼자’ 했다.  

    

그를 보면 뛰는 내 가슴이 사랑인지 뭔지도 몰랐다. 그렇게 지방 전문대를 입학한 나는 이후 그가 결혼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얘기를 전해 들었다. 심장 한편이 무너지는 소릴 들었다. 그때 나는 어렸고 그는 어떤 책임질 만한 행동도, 언약도 한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소리 없이 눈물만 삼켰다. 그렇게 그와 혼자 이별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도 했다. 힘든 시간들을 보냈고 십여 년 전 나는 이혼했다. 구구절절한 인생은 나를 바닥까지 밀어댔고 나는 나를 포기하려 했다.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든 날들이 지나갔다. 눈물도 말라붙었고 살아야 하는 이유도 뭣도 없이 시간을 죽였다. 그즈음 나는 그의 소식을 들었다. 귀농해서 잘 지내신다는 동창들의 얘기에 초라해진 나는 연락처를 손에 쥐었지만 감히 그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그 날, 죽기 전에 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심정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부로 시작한 대화는 속을 숨길 겨를도 없이 새어 나와 마침내 십 년 먹은 체증을 토해내듯 가슴속의 울화를 토해냈다. 시장통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가 찾은 아이처럼 그동안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울음을 헐떡이며 고해바쳤다. 밑도 끝도 없는 내 흐느낌을 그는 듣기만 했다.     


그를 만나고야 알았다. 그도 이미 혼자가 되었음을. 영화처럼 그렇게 우리는 30년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났다. 내 편이 생겼다. 나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때문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사 남매를 키워야 하는 가난한 엄마는 늘 지쳐있었고 가슴이 차가웠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 입을 책임졌다. 그렇게 평생 시베리아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외로움과 우울감에 쩔쩔매던 내게 드디어 내 편이 생긴 거다.

      

그를 만나고 바닥을 기던 나의 자존감도 서서히 회복해 갔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예쁘다고 말해줄 때마다, 사랑한다고 속삭여 줄 때마다 나는 살아났다.      

우리의 신혼집은 정읍 어느 시골마을. 여기서 나는 새댁으로 불린다. 평균 연령이 70대 가까이기에 여기에서 나는 이 효리와 동급이다(내 생각). 나보다 8살 많은 그는 청년, 나는 새댁이다. 그와 나는 갖가지 사연으로 몸뚱이뿐이다. 맨손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산다.  

    

다행히 시골생활은 몸만 움직이면 굶지 않는다. 동네에는 항상 일손이 필요하다. 돈 대신 농작물도 받고 푼돈이지만 돈도 번다. 아메리카노를 사서 마시거나 영화를 본다 거나한 문화생활만 포기하면 나름 살만하고 크게 돈 쓸 일도 없다.      


그와 다 허물어져가는 시골집에서 고기 없는 밥을 먹고, 싸구려 커피믹스를 마시고 저녁이면 동네 저수지를 산책한다. 같이 벌을 치고 조그만 밭뙈기에 농사를 짓는다. 폭염에 농사는 폭망 했어도 그만 보면 웃음이 난다.      

10개월을 살다 보니 동네에 친한 언니도 생겼다. 가끔 일을 도왔더니 오늘은 고구마랑 고구마순을 챙겨줬다. 고구마순을 하루 종일 깠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손도 시커메졌다. 도시에 살 때 나를 지켜주고 응원해 준 친구에게 뭐라도 주고 싶은데 여전히 가난한 나는 줄 것이 없다. 그래서 이거라도 보내주고 싶은 마음에 부지런히 손질을 하고 박스에 담아 그녀에게 택배를 붙였다. 별거는 아니지만 뭔가를 줄 수 있음에 괜히 가슴이 뿌듯해진다. 농사가 잘 됐으면 내가 지은 농산물을 보내고 싶었는데.  

    

고구마 순을 같이 까주던 그가 벌통을 확인하러 산으로 가고 나는 나머지로 김치를 담갔다. 오늘 저녁 메뉴다. 그가 이것에 밥을 두 그릇 먹을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배가 부르다.   

  

그와 같이 있을 때도 그와 떨어져 있을 때도 나는 그에 대한 생각뿐이다. 가난하고 어렸던 나를 보살펴주었고 상처 받고 쩔쩔매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이제 내가 그를 지켜주고 맘껏 사랑하려 한다. 가난 따위가 감히 우리를 방해하지 못한다. 질곡의 삶은 내게 절망을 주었지만 나를 마징가제트보다 더 강하게도 만들었다.

오늘은 밤바람이 시원하다. 그와 손잡고 돌아본 저수지 옆에는 벌써부터 가을이 서 있다.

     


훈훈하다. 그녀가 그에게 가던 날, 분명 좋은 날인데 기차에서 내게 전화한 그녀는 목 놓아 울었다. 행복하러 가는 건데 왜 우느냐고 나도 꺼이꺼이 울며 둘이 신파를 찍었다. 그랬던 그녀가 잘 지내는 걸 보니 좋다. 택배박스를 앞에 두고 우리는 한참 톡을 했다. 아주 염장을 지른다. 말끝마다 ‘우리 쌤’ ‘우리 쌤’뿐이다. ‘우리 쌤’ 없는 사람 참 서럽다.      

보내 준 고구마 순을 씻는데 웃음과 눈물이 같이 났다. 교류기간에 관계없이 어느 순간 누군가의 영혼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상처 받은 영혼은 가슴 깊이 각인이 된다. 그녀가 그랬다. 다행인 건 이제 더 이상 피 흘리지 않는다는 거다. 조만간 정읍에 내려가려 한다. 둘이 손잡고 걸었다는 저수지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셋이 커피믹스를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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