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양연화 May 21. 2019

졸혼이 불안한 사람들의 공통점.

인생도, 결혼도 마라톤과 같았으면.

4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 나는 생애 첫 5킬로 마라톤에 도전했다. 사실 준비를 따로 한 건 아니고 친구 따라 강남 간 셈이다. 요가 강사로 일하는 내 친구는 수영, 배드민턴, 헬스 등등 무슨 철인 3종 경기하듯 운동을 많이 하는데, 이번에 마라톤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혼자 참가하긴 심심하니 나더러 같이 참가하잔다. 뛰다가 힘들면 걸어도 된다며.   

  

요즘 나는 강아지 데리고 한두 시간 산책하는 게 운동의 전부다. 걸음도 원래 느려서 빨리 걸으면 스텝이 엉켜 잘 넘어진다. 다리도 약간 오다리에 어려서 걸음마를 제대로 안 배운 것 같다. 그런 내가 마라톤에 참가하다니.      

마라톤 대회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이슬비가 살짝 내리고 추웠다. 나는 반소매에 티에 검은 레깅스를 입었는데 왠지 민망해서 그 위에 반바지를 덧입었다. 친구는 운동선수답게 표범 무늬 레깅스를 입고 나타났다. 의상부터 졌다. 둘러보니 남자 참가자들도 레깅스를 많이 입었다. 나만 촌사람.

      

이번 마라톤 대회는 하프 마라톤이라 하프를 신청한 사람들이 먼저 출발했고 그다음 10킬로, 그다음이 우리가 포함된 5킬로 참가자들이다. 내 참가 번호 9517번, 번호표를 배에 달고 있으니 진짜 달리기 선수가 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고 친구와 나도 뛰었다. 나는 초보운전자처럼 ‘나는 이미 틀렸으니 먼저 가’라고 친구에게 사인을 주고 내 속도로 뛰었다. 날이 추워서인지 생각보다 뛸만했다. 나의 목표는 기록에 상관없이 중간에 쉬지 않고 뛰기. 그래서 거북이 같은 속도로 달렸다. 조금 가다 보니 1킬로 팻말이 있었다. 놀랐다. 내가 1킬로를 뛰었구나. 그리고 2킬로, 3킬로 팻말이 스쳐 지나갔다. 이쯤 되니 다리가 오토매틱으로 움직였다. 숨이 차고 힘이 들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뛴 거 쉬지 말고 완주해보자 하는 욕심이 들었다.  

    

1킬로가 남았을 때 체력이 바닥났다. 하지만 나는 이때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쉬거나 멈추면 내가 하고자 하는 뭔가(시나리오 쓰기)를 끝내 이루지 못할 거 같은 생각. 이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여튼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이 컸는지 완주에 성공했다. 기록은 35분. 뭔가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면서 벌써 백상 예술대상의 대상에 달하는 작품을 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작 결승점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친구도 나를 보고 놀라워했다. 예상보다 너무 잘 뛰어서. 대회에서 준비해준 국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잔디밭에 앉아서 환희를 만끽했다.    

  

친구는 결혼 25년, 나는 23년이다. 친구는 얼마 전 남편과 다투고 절교 상태로 지내다가 며칠 전 극적 화해를 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귀찮게 한다며 괜히 화해했다고 투덜거렸다. 한두 번 듣는 레퍼토리가 아니라 나는 그냥 웃었다. ‘사네, 못 사네’ 하면서도 우리가 결혼을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뭘까. 이혼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대가가 개인에게 너무 벅차다 싶을 때 졸혼은 대안이 될까.     

 

얼마 전 동창 모임에 갔다가 불편한 소리를 들었다. 목동에 사는 한 친구가 아이들이 결혼할 나이가 다가오니 걱정이 많다고 했다. 초등 때부터 함께 지내온 동네 아파트 엄마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이구동성 한 이야기가 요즘 세상이 무서운데 ‘집안에 문제가 있는 아이가 배우자로 들어와 집안을 망칠까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결론은 ‘서로 잘 아는 사람들끼리’ = ‘정상적인 반듯한 집안’끼리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고 사는 데 문제가 생겼다. 이게 집안에 문제가 있는 한 사람 탓일까. ‘반듯한 집안’이란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화목한 가정을 뜻하는 것 같은데 깊이 들여다보면 문제없는 집 없다. 무엇이 정상의 기준일까. 보이고 싶은 면만 보여주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과연 보이는 게 다일까. 더 놀라운 건 모두 ‘맞아 맞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무서운 게 아니라 나는 이 상황이 더 소름 끼쳤다. 결손 가정에서 자라는 것은 자신의 잘못도, 선택도 아닌데 미리부터 ‘문제가 있는 사람 취급’을 당해야 한다니.  

    

사실 내가 진정 안절부절못한 이유는 내 옆에 앉은 친구 때문이다. 15년 전에 남편이 다른 여자랑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이혼하고 친구 혼자서 딸 둘을 키우느라 골병든 친구. 이 친구의 눈물 나는 이야기를 잘 아는 나는 친구가 받을 상처에 맘이 쓰였다. 목동 친구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옆에 앉은 친구가 더 불편할 것 같아 화재를 다른 것으로 돌리느라 진땀을 흘렸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며 속상해하자 마라톤을 같이 한 친구는 이런 시선 때문에 우리가 참고 사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좀 힘들고 말지 하는 심정으로. 자식 때문에 산다는 말은 핑계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사는 사람들에게는 살만한 이유가 있고 헤어진 사람들에겐 또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돈 때문에, 혹은 서로 가장 만만한 편안함 때문에 살기도 하고, 또 그 돈 때문에, 혹은 존중받지 못해서 헤어지기도 한다. 결혼해 살다 보니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도 필요하지만, 그 중간 어디쯤 완충할 만한 다양한 대안도 필요하다고 느낀다. 길이 다양해야 절벽 끝에 섰을 때 퇴로가 확보되니까. 퇴로가 단 하나 거나, 없는 인생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거니까.     

 

어느 글방 모임에서 졸혼에 관하여 토론을 했었다. 대체로 결혼생활이 오래된 여자일수록 앞으로 누구의 아내, 엄마, 자식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어떤 이는 졸혼을 비겁한 선택이라 했고 어떤 이는 졸혼으로 인해 쉽게 가족제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사회적 문제를 지적했다. 그런데 주변 형편을 고려해 좀 비겁하면 죄가 되는지, 제도가 개인의 불행보다 우선 한지 의문이 들었다. 졸혼을 불편하게 여기는 시선에는 불안감이 묻어 있었다. 이 불안감은 남녀로 구별되기보다 돌봄을 받아 온 사람과 돌봄을 해 온 사람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길고 힘들다는 뜻이다. 살아 보니 그 말이 맞고 뛰어보니 또 그 말이 맞다. 마라톤은 절반 뛰고 되돌아오는 코스다. 중간중간 물도 있고 사람들 응원도 있고 정 힘들면 멈춰도 되고 다음에 다시 도전해도 된다. 인생도 편견 없이 그랬으면.     


고작 5킬로를 뛰고 일주일을 앓았다. 무식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덕분에 침대 위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내 남편은 어떤 삶을 살길 원할까. 우리가 지금처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공간을 따로 갖고 각자의 삶을 응원하는 건 꿈같은 얘기일까. 이제 ‘나를 위해 혼자 살아보고 싶다’라는 말이 행여 ‘당신과 이제 살기 싫다’라는 날카로운 상처의 말로 들릴까 봐 말을 꺼내기 주저된다. 아직 돌봐야 하는 자식이 있으니 자식 핑계 대고 좀 더 살아야 할까 보다. 아직도 다리가 아프다.                    

작가의 이전글 그녀 나이 47세, 시골마을에 신혼집을 차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