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있는 본태박물관의 본태(本態)는 '본래의 모습'을 뜻하며,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탐구하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총 5개의 전시 공간으로 이뤄진 이곳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건축물로 그의 시그니쳐라 할 수 있는 노출콘크리트, 물, 빛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박물관으로써 ‘본태’를 잘 보여준다.
안도 타다오는 공고 출신으로 권투 선수를 하다가 르코르뷔지에의 책을 읽고 건축에 홀딱 반해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 건축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세계적인 건축가다. 그의 건물은 여러 단계를 거쳐야 입구에 도달하는데, 이는 공간을 최대한 넓게 보이는 효과와 복잡한 진입 시퀀스를 통해 다양한 공간을 보여주려는 건축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그가 사용하는 노출콘크리트가 특별한 이유는 콘크리트임에도 만져보면 대리석처럼 매끈하다.
내가 방문한 날은 12월이지만 기온은 따스했고, 구름은 많았지만, 맑은 날이었다. 박물관 앞 호수에 구름이 비쳐 위아래가 모두 하늘 같았다.
제1전시관은 전통 수공예품 800여 점이 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우리가 흔히 쓰던,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잊고 있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반, 보자기, 병풍, 가재도구 등 오랜 시간 사용감이 있는 물건들이 박물관 안에서 새 생명을 부여받고 새롭게 숨 쉬고 있었다.
맨 위 왼쪽에서부터 보면, 소반이다. 나주반, 해주반, 통영반처럼 지방 이름이 붙거나 다리 모양에 따라 호족반 구족반 등으로 이름을 달리 한 소반들이 벽면 가득 걸려있다. 자개가 붙어 기하학적인 문양의 소반은 화려함이 돋보이고, 무늬가 없는 사각 혹은 원형의 소반은 단아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식적인 기교가 넘치는 다리들도 제각각 개성이 넘친다. 게다가 한꺼번에 모아 각각 다른 측면을 보여주니 선과 면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소반은 운반되기 쉬운 규격과 구조로 만들어진 1인을 위한 식탁이기에 크기가 작다. 좌식 생활이 입식 생활로 변하면서 소반을 대신할 식탁이 사용되었고, 그렇게 소반은 쓰임새가 줄어들었다.
소반 옆에 나란히 걸린 작품들은 보자기다. 어렸을 때 집집마다 흔하게 보던 물건. 보자기는 어떤 물건도 포용한다. 각진 물건이든 둥그런 물건이든 가리지 않고 그 형태를 온전히 품는다. 보자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독창적이다. 우선 이불이나 옷을 짓고 남은 자투리 천을 이용해 만들었다. 만드는 사람의 미적 안목에 맞춰 색을 배분하고 모양을 배치해 한 땀 한 땀 바늘로 꿰매는 작업은 비슷한 물건은 있어도 똑같은 물건은 없는 유일무이한 물건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보자기는 원단에 따라 모시, 무명, 명주 등으로 나뉘고 용도에 따라 밥상 보자기, 패물 보자기 등으로 구별됐다. 보자기는 현대 미술 관점에서 봐도 월등하다. 세계적인 추세인 폐품을 활용했다는 것도 그렇고 색을 고르고 모양을 배치하고 그것들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꿰매 만드는 작업은 보통 심미안과 손재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왼쪽 아래 작품의 정체는 베개다. 베개를 쌓아 올리고 베갯모를 정면으로 배치했는데, 베개 각각의 아름다움에 한 번, 큐레이션에 또 한 번 놀랐다. 이 자체로 완벽한 조형물 같았다. 똑같은 문양이 하나도 없는 다양한 무늬와 다채로운 색깔, 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문자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왔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모았는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나란한 수저집도 두말하면 입 아프다. 작은 원단 위에 자수가 톤온톤(채도는 다르고 색은 비슷하게)으로 세밀하게 수놓아져 우리 선조 여성들의 수준 높은 예술적 안목을 흠뻑 느낄 수 있다. 단지 ‘우리 것은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거다. 자수를 일컬어 ‘태양의 빛으로 쓴 기원문’이라 하는 이유는 태양 빛의 상징인 오색실로 지어졌기 때문인데, 자수가 들어간 모든 물건들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1관은 특히 큐레이션이 빛나는 전시였다.
미로 같은 길을 따라 전시를 보다 보면 2층에서 시작된 전시는 어느새 1층으로 이어지고, 잠시 쉬어갈 카페가 나타난다.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밖으로 나오면 마법 같은 장면이 펼쳐지는데. 안도 타다오가 호수가 없다면 건물을 짓지 않겠다고 말할 만큼 중요한 공간으로 박물관 입구에서 보던 연못과 같은 연못인데 반대편(카페 쪽)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장면이다.
날이 춥지 않아 야외 테이블에 앉아 저 풍경을 보는데, 유럽 어딘가에 있는 착각이 들었다. 잠시 따뜻한 차를 마시며 풍경을 감상하고 이번엔 바깥으로 난 미로를 따라 제2 전시장에 도착했다. 건물은 지루할 틈 없이 방향만 바꾸면 매번 드라마틱한 장면을 보여줬다. 박물관 자체가 예술이라 걸음걸음 사진 찍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2전시관은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는 곳으로 복층 구조인 이곳은 특이하게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우리 전통 물건들이 전시된 1관은 서양식 동선이라면 현대 미술품을 전시한 이곳은 동양식이랄까? 뭔가 신선했다. 보일러가 돌아 바닥이 따뜻한 마루에 올라서면 마치 가정집처럼 생긴 공간에 피카소, 몬드리안, 살바도르 달리,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 49점 있다. 2층 창을 통해 밖을 보면 제주도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산방산이 그림처럼 걸려있다.
이 작품은 앤디 워홀의 수채화 작품인 ‘황소’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 하면 주로 실크스크린 작품만 떠올리는데, 수채화가 있어서 반가웠다. 그것도 우리에게 친숙한 ‘황소’가 순박한 얼굴을 하고 관람객을 바라본다. 그림 아래 사인만 없다면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 해도 믿을 것 같다. ‘황소’는 앤디 워홀이 자연과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동물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또 레터링 작품으로 유명한 로버트 인디애나의 <HOPE>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LOVE’는 전 세계 50여 개국에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인디애나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의뢰받아 처음 ‘LOVE’ 레터링을 만들었고, 이게 큰 성공을 거두자 조각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후 ‘LOVE’과 가장 가까운 단어로 선택한 게 HOPE다.
제3 전시관은 쿠사마 야요이의 설치 작품 2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쿠사마의 대표작인 까만 점이 가득 박힌 노란 호박과 무한 거울의 방이 그것이다. 호박은 이곳뿐 아니라 석파정, 인천 파라다이스 호텔 등 몇 곳에서 볼 수 있다.
무한 거울의 방-쿠사마 야요이
무한 거울의 방에 들어서면 1평 남짓한 바닥 옆으로 물이 채워져 있고, 벽면은 사방이 거울이다. 허공에 매달린 빨강 파랑 형광의 크고 작은 불빛들이 거울과 물에 반사되고 확장되면서 무한의 공간이 탄생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불빛들을 바라보면 처음엔 황홀하다가 나 또한 점의 일부가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쿠사마는 1929년에 태어나 현재도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쿠사마’하면 ‘광기와 예술의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1977년, 쿠사마는 48세의 나이에 제 발로 정신 병원에 찾아가 입원했고 현재까지도 그곳에서 생활하며 인근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데, 그녀는 대체 무슨 사연이 있을까?
쿠사마는 외도를 밥 먹듯 하는 아버지와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쿠사마에게 푸는 엄마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았다. 정신적인 문제까지 발생한 어린 쿠사마에게 엄마는 치료 대신 매질을 했다. 쿠사마는 편집증과 강박에 시달리다가 어느 순간 환각을 경험한다. 쿠사마가 처음 경험한 환각은 빨간 점이었는데, 처음엔 나타났다가 사라지던 점들이 점점 일상을 점령했고 결국 자기 몸까지 점으로 뒤덮이는 환각 속에서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쿠사마를 더 외롭게 만들었던 건 자기 눈에 보이는 것들이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기가 느끼는 공포를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고 철저히 혼자 겪어야 했다. 그때 쿠사마에게 위로가 되었던 물건이 호박이다. 당시 아버지는 호박 도매업을 하고 있었고, 창고에는 항상 호박이 쌓여있었다. 누구와도 마음을 열지 못한 쿠사마는 호박을 친구 삼아 마음을 의지했다.
평생 현실과 환각을 오가며 살았던 쿠사마는 호박에 자기가 겪은 트라우마를 점으로 그려냈다. 호박의 점들에 자신을 투영했다면 무한 거울의 방은 쿠사마의 내면을 표현한 것이다. 점들 사이에서 자아가 소멸하는 공포를 표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관람객은 공포보다는 그 아름다움에 현혹되고 만다. 무한 거울의 방은 관람 시간이 2분으로 정해져 있지만 얼마든지 재관람이 가능하다.
제4전시실은 ‘피안으로 가는 길의 동반자’로 우리나라 전통 장례 문화를 다루고 있다. ‘피안’은 저승을 뜻하는 불교 용어로 상여나 영어(영혼과 관련된 것을 운반하는 가마) 등 장례용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 규모가 꽤 크다.
4관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목각 상여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꽃상여가 지나가는 것을 종종 봤었기에 꽃상여가 전통 상여라 생각했는데 목각 상여가 일반적이라는 점에 놀랐다. 나무를 깎아 모든 장식을 일일이 만든 모습이 한눈에도 큰 공이 들어가 보인다. 목각 상여는 마을공동체에서 구매해 공동으로 사용하거나 대여해서 사용했고, 필요할 때마다 재사용했다.
목각 상여 중앙 맨 꼭대기에 선 남자는 ‘동방삭’이다. ‘김수완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척갑자동방삭’에 나오는 그 동방삭. 정면에서 보면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인데, 옆모습이라 잘 보이지 않는다. 설화에 따르면 동방삭은 삼천갑자(1 갑자=60년/3000 ×60=18만 년)를 산 인물로 이 인물을 잡으러 파견된 저승사자가 영화 ‘신과 함께’에 나온 강림도령(하정우 분)이다. 강림도령은 염라대왕의 명을 받아 동방삭 체포조로 투입되어 결국 그를 체포한다.
사람이나 동물 모양의 꼭두도 전시되어 있는데, ‘꼭두’란 상여를 장식하는 조각상으로 상여에 매달거나 고인과 함께 매장하기도 했다. 내 눈에 꼭두란 살아서 슬펐던 사람, 죽어서 웃으라고 (광대 꼭두), 살아서 죽도록 고생만 했던 사람, 죽어서 편하라고 (시녀 꼭두)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살아서 외로웠던 사람, 죽어서 외롭지 말라고, 먼 길 벗 삼아 가라고, 꼭두를 매달아 주거나 함께 묻어 준 거로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죽음과 연결된 전시다 보니 숙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5 전시실은 기획전시로 불교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으나 아쉽게도 사진 촬영이 금지다.
7박 8일 제주에 머무는 동안 입장료가 가장 비싼 미술관에서부터 무료인 미술관까지 10여 곳을 방문했다. 한 꼭지를 따로 쓰려고 마음먹었던 이중섭 미술관은 리모델링 중이라 아카이브 전시만 볼 수 있어 아쉬웠고, 제주 도립 김창열 미술관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또 기대 없이 갔다가 깜짝 놀란 ‘세계 자동차 & 피아노 박물관’도 오래 기억이 남을 것 같다.
뭐니 뭐니 해도 제주는 눈에 보이는 자연환경이 모두 예술이니 여행 내내 걸작을 보고 다닌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주에 살거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어느 하루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