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현대 미술관 편.
제주도 미술관 투어를 위해 7박 8일 일정으로 제주도에 왔다. 제주 현대 미술관에서는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 전시가 11월 26일부터 시작인데 그 날짜에 맞춰 일정을 잡았다. 이 전시는 경주에서 시작해 부산을 거쳐 제주에 도착한 전시로 내년 서울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제주에 도착하고 다음 날, 서울 경기에 폭설이 내렸다며 지인들로부터 눈 사진들이 속속 도착했다. 제주는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전시는 남아공 국립 미술관인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 특별전으로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부터 현대 미술까지 총 143점의 원화가 전시된다. 전시 제목만 봐서는 (1874년 시작된) 인상파 화가에서부터 20세기 현대 미술까지인 것 같지만 그 이전 작품도 포함된 걸 보면 아무래도 대중적인 눈높이를 고려해, 누구나 아는 모네라는 걸출한 작가를 전시 제목에 쓴 것 같다. 요하네스버그 미술관은 3만여 점의 작품을 보유한 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미술관으로 이번 전시엔 남아프리카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도 25점 포함되어 있다.
요하네스 아트 갤러리는 플로렌스 필립스 여사(1863~1940)로부터 시작되었다. 1885년 플로렌스는 라이오넬 필립스와 결혼했고 그가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영국으로 추방되었을 때 함께 런던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미술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처음엔 18세기 영국 미술을 수집하다가 점점 안목이 넓어져 종국에는 공공 미술관 건립이라는 원대한 꿈으로 이어졌다. "미술관은 예술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공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화를 창조하고 육성하는 시민사회의 소중한 장소이기도 하다"라는 플로렌스의 신념 아래 개인 미술관이 공공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플로렌스 여사를 첫 번째 공간에서 만났다. 안토니오 만치니(1852~1930)가 그린 초상화로 챙이 넓은 모자와 화려한 목걸이로 한껏 꾸민 모습이 우아하고 기품 있다. 플로렌스는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관객을 맞이한다. 마치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안토니오 만치니는 이탈리아 화가로 파리에서 에드가 드가, 에드와르 마네와 교류했고, 영국에서는 존 싱어 사전트의 소개로 사교계에 입성, 초상화가로도 활동한 국제적인 화가다. 거친 붓 터치가 인물의 생생함을 더해주고 명암 대비가 인물을 더 도드라지게 해 초상화 임무에 충실한 그림임을 느끼게 한다. 사실적이면서도 포토샵이 적당히 되어 있어 아마 플로렌스가 완성된 작품을 봤을 때 꽤 만족했을 것 같다.
두 번째 구획에서는 남아프리카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위 작품은 남아공 출신의 세계적인 여자 작가 이르마 스턴(1894~1966)의 '바후투 연주자들'이다. 강렬한 색채, 군집한 인물들의 역동성과 동작에서 느껴지는 리듬감, 눈빛에서 쏟아지는 원시적 아름다움이 압도적이고 무엇보다도 바후트 연주가 화면을 뚫고 나올 듯 감각적이다.
스턴은 독일계 유대인 부모 사이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당시 독일에서 성행하던 표현주의를 남아공에 들여온 화가다. 1919년 베를린 첫 전시를 시작으로 유럽과 남아공에서 100회가 넘는 개인전을 열었다. 유럽에선 일찍이 인정받는 작가였지만 여성 작가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고국에선 1940년 이후에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고 2011년, 그녀의 작품이 25억에 판매되면서 남아공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작가가 되었다. 이번 전시에 스턴의 작품 네 점이 소개되는데, 세잔의 영향을 받은 사과 정물과 고흐가 연상되는 해바라기도 포함되어 있다.
세 번째 방은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기를 다루고 있다. 네덜란드는 렘브란트(이번 전시에는 없지만)를 필두로 그림에 있어 특출 난 장인들이 많다. 그중 가장 눈이 간 작품은 게릿 아렌츠 반 뒤어스(1664~1702)의 <노인이 노래하면 젊은이는 피리를 불어라>라는 작품이다. 제목부터 궁금증을 자아낸다. 작품 속 안경을 올려 잡은 노인이 악보를 들고 노래하면 식탁 아래 아이와 맨 뒤 젊은이가 피리를 부는 모양이다.
'노인이 노래하면 젊은이는 피리를 분다'는 네덜란드의 속담으로 노인이 행동하면 젊은이는 한술 더 뜬 행동을 하니, 나이 든 사람이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속담을 모르고 본다면 단란하기 그지없는 가족으로 보인다. 마치 가족 음악회 분위기가 물씬 난다고나 할까. 내겐 교훈을 주기보단 가족 초상화처럼 보였다. 인물들 시선이 모두 제각각인 것도 재밌고 식탁 아래 등 돌리고 연주에 열중한 아이 볼이 너무 사랑스러워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다음 방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미술이다. 영국의 국민화가 윌리엄 터너의 작품도 있지만,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이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1828~1882)의 <레지나 코르디움>과 존 에버릿 밀레이의 <한 땀! 한 땀!>이다. 두 사람은 라파엘전파의 창시자로 '레지나 코르디움'은 라틴어로, 번역하면 마음의 여왕이란 뜻이다. 붉은 머리를 늘어뜨린 모델은 엘리자베스 시달이다. 이 여인, 어딘가 눈에 익지 않은가? 맞다,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명작 오필리아에 등장했던 그 모델.
시달은 상점 점원이었다가 모델로 발탁되어 라파엘전파의 숭배를 받았던 인물로 로세티는 동료가 그린 그림 속 시달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이 그림은 오랜 연애 끝에 두 사람이 결혼할 무렵에 그린 그림인데, 시달은 작은 보라색 꽃을 들고 빨간 목걸이를 감은 채 어딘가에 고혹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다.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이 금빛 하트 문양 배경 위에 그려져 더욱 신비롭다. 로세티는 시달과 결혼 후 잦은 외도를 저질렀고, 생활비도 제때 주지 않아 결과적으로 시달은 아편에 중독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결혼 후 2년 만의 일이었다.
그들의 사연을 알고 그림을 보면 아름다운 시달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지 몰라도 시달은 어딘지 지쳐 보이고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이라고 보기 힘든 우울과 무기력이 가슴속 깊이 내재된 것처럼 보인다.
라파엘전파란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자'라는 뜻으로 르네상스 초기 미술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유파로 그들의 그림들은 대체로 화사하고 디테일이 엄청나며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여인을 보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눈동자, 적당히 붉은 입술, 목에 겹쳐 입은 하얀 레이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사랑스럽다. 만일 전시 작품 중 단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무조건 이 작품이다. 살짝 벌린 입술이 곧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이 작품을 그린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그림 하나로 준 남작의 직위까지 오른 화가다. 화가가 귀족에 오른 건 밀레이가 처음이고 당시 가장 비싼 그림 값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은 모네의 <봄>이다. 이번 전시에서 밀레, 고흐, 뭉크, 등은 습작 느낌인데, 모네의 <봄>은 크기도 큰 유화 작품이다. 캐리커처를 그리기 시작해 인상주의를 탄생시킨 모네 옆에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외젠 부댕의 그림도 세 점이나 있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 특유의 빠른 붓 터치와 빛에 따라 변하는 색채가 역시나 눈부시게 잘 표현되어 있다. 인상주의 그림은 멀리서 봐야 그 진가가 드러나니 꼭 뒤로 물러서서 감상해 보시길.
좋은 작품도 많았고 꼼꼼하게 살펴보느라 세 시간 가까이 관람했는데, 함께 온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두 시간 전에 문자가 와 있었다.
“관람 끝났고 카페에서 기다림”
카페로 가보니 아들이 그림처럼 앉아 이어폰 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창밖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전시 설명도 듣고 그림도 오랫동안 볼 것이지 왜 벌써 나왔냐?’는 타박이, 맨날 꾸물대면서 이럴 때는 또 빠르다는 빈정거림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어쩌면 이런 그림은 평생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속이 편치 않은 내게 아들은
"엄마 좋아하는 그림 실컷 봐서 행복했어?" 묻는다.
이거 혹시 돌려 까긴가? 싶어 잠시 혼란이 왔지만, 그러기엔 아들의 표정이 해맑았다. 내가 <한 땀! 한 땀!>에 정신이 팔려 있을 동안 혼자 두 시간 기다리느라 저도 지루하고 힘들었을 텐데, 내 마음을 먼저 살피다니.
만일 그가 좋아하는 게임 하느라 내가 혼자 카페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면 어땠을까.(엄마 금쪽이 난동 예상) 나도 게임하면서 행복했냐고 진심으로 물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런 그림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처럼 아들과의 여행도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인데. 그러니 내가 해야 할 말은 타박과 빈정의 언어가 아닌 늦어서 미안하단 말이었다. 나는 빠르게 다음 행선지(아들이 가고 싶어 한)를 향해 차를 몰았다. 저녁에 그가 먹고 싶다던 고등어회도 사주기로 결심. (원래는 비싸서 안 사줄 마음이었지만)
숙소에 돌아와 아들과 어떤 그림이 좋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은 모네의 봄이 좋았다고 했다. 아트숍에서 산 전시 도록을 함께 보며 작품과 화가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그리고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그제야 꺼냈다.
"아까 오래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미안해. 다음엔 좀 더 서두를게" 아들은 그렇게 미안하면 치킨 쏘란다. 고등어회 먹었더니 속이 냉하다면서. (분위기 급랭)
제주 현대 미술관은 저지 문화 예술인 마을에 있다. 제주 느낌이 물씬 나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비까지 와서 운치가 더 좋았다. 인근에 함께 보면 좋은 김창열 미술관과 제주 공예 박물관이 있고 산책하기 좋은 정원 방림원도 있다. 익숙한 누군가를 새롭게 알고 싶다면 낯선 곳을 함께 여행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 도록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