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 해도 끝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있다. 군필 한 남자에게 그것이 군대 이야기라면 아이 엄마에게는 출산 얘기다. 간호사인 나는 병원 실습 때 처음 출산 장면을 목격했다. “으아~~~”하는 산모의 비명과 “조금만 더” 힘을 주라는 의료진들의 목소리가 섞여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서 있느라 보는 것만으로도 어깨에 담이 왔다. 마침내 도저히 사람 머리가 튀어나올 수 없어 보이는 그곳에서 시커먼 아이의 머리와 함께 밀려 나오는 오물은 충격을 넘어섰다. ‘이렇게 이쁜 아이가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태어나는구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날이 내게도 왔다. 저녁부터 진통이 밀려왔지만, 곧바로 병원으로 가는 대신 밤새 참았다. 날이 밝자 친정엄마는 비장한 얼굴로 아침부터 고기를 볶았다. 고기를 볶다가 내가 식탁에 엎드리면 엄마는 내 등 뒤로 와서 내 배를 문질문질 했다. “엄마도 이렇게 아팠어?” 끙끙대는 내 물음에 엄마는 대답 대신 안타까운 감탄사 ‘아이고’만 남발했다. 고개를 들어 엄마를 보니 엄마는 나보다 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괜히 맘이 찡해져서 말없이 진통 사이사이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자궁문이 많이 열렸다며 분만 촉진제를 놓아주었다. 곧바로 양수가 터졌다. 하지만 곧 나올 것 같던 아이는 오후 세 시가 넘어도 나오지 않았고, 에어컨도 틀었는지 안 틀었는지 모를 여름 속에서 나는 점점 탈진했다. 마지막으로 내진한 간호사가 분만대로 옮겨야겠다는 말을 아련히 들으며 나는 기절해버렸다.
눈을 뜨니 회복실이었다. 의사가 다가와 정신이 드냐고 묻더니 응급으로 제왕절개를 했고 아이는 건강하다고 했다.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다. 수술실 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엄마가 뛰어왔고 옆에 사색이 된 남편이 엉거주춤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병실로 옮기고 엄마도 집으로 돌아가자 남편은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내가 애 낳다가 죽을까 봐 무서웠다며 앞으로 평생 나를 위해 살겠다고 뜬금없는 맹세를 했다. (feat. 거짓말이야.)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생은 고비고비 고비사막. 젖이 불기 시작했다. 커지는 젖의 크기와 맞물려 진짜 엄마가 된 듯한 뿌듯함이 몰려온 것은 잠시, 가슴 전체가 돌덩이처럼 굳어지더니 아프다. 누구는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는데(제20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영화 제목), 나는 젖소 가슴으로 울었다. 남편은 의사의 지시대로 고무장갑 안에 면장갑을 끼고 뜨거운 물수건을 짜서 내 가슴에 올리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수건을 교체하려고 걷어 낼 때마다 내 가슴은 마블링이 선명한 꽃등심처럼 벌겋게 익었다.
잘 익은 꽃등심을 유축기에 대고 짰다. 하지만 생각만큼 유선은 뚫리지 않았고 결국 꼭지가 갈라져 피가 났다. 이 짓을 한 달이 넘게 했다. 아이가 젖을 먹다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려서 살펴보면 아이 입속에 피가 고인 적도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통증 때문에 수유 브라는 몸에 대지도 못했다. 아이가 울면 자동으로 젖이 나오니 입고 있는 헐렁한 면티는 가슴 부위가 얼룩덜룩해지고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처럼 초라한 모습에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돌아보면 나는 산통보다 젖몸살이 더 몸서리쳐진다.
그런데……. 나는 또 둘째를 낳았다. 세 살 터울 아들 둘을 키운다는 것은 몸에서 사리가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등신불처럼 온몸이 사리가 되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둘째 젖을 먹이려고 안으면 첫째가 울었다. 질투에 온몸이 불타오른 큰아이는 식음을 전폐했다. 그즈음 우리 집에서는 세 명의 곡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처음, 아이 둘만 놓고 잠깐 집을 비운 그 5분이 생생하다. 둘째가 백일쯤 되었을 때, 큰아이가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는데 두부가 없다. 집 앞 50m 전방에 슈퍼가 있다.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두부를 사려면 우선 커다란 유모차를 들고나가 계단 7개 아래에 내려놓고(빌라 1층에 살았음) 큰아이를 최대한 뒤쪽에 다리를 벌리고 앉힌다. 곧바로 뛰어 들어가 둘째를 안고 나와 큰아이 다리 사이에 작은 아이를 눕히고 출발한다. 두부를 사고 돌아와 다시 큰아이, 둘째 아이, 유모차까지 집안으로 옮기고 나면 밥이고 뭐고 드러누워야 할 판이다.
나는 큰아이가 좋아하는 핑구 비디오를 틀었다. 그리고 둘째 아이가 누워있는 흔들 침대를 큰아이 옆으로 놓았다. “엄마 뛰어가서 두부 사 올게, 아기가 울면 침대 좀 흔들어줘.” 큰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우사인 볼트보다 빠르게 뛰어가서 두부를 사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세상에, 큰아이는 침대를 흔들며 아기를 보며 ‘까꿍’을 하고 있었다. 이 장면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큰아이 손에 집문서라도 쥐여 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 발을 동동 그루는 사이 남편은 새로 시작한 사업과 박사 학위 과정에 있다 보니 바빴다. 남편의 바쁨이 나를 위한, 가정을 위한 바쁨이라 철석같이 믿고 그 시간을 혼자 견뎠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랐다. 남편은 박사가 되었고 사업도 자리를 잡아갔다. 질투는 아닌데 그는 나아가고 나는 한없이 뒤처지는 느낌에 행복하지 않았다. 내 삶은 오로지 그의 조력자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남편은 내 이런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가정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만큼 자신도 열심히 사는데 뭐가 문제냐는 거다. 나의 눈물에 그는 한숨으로 답했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한집에 살지만, 그와 내가 다시 가까워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최근 ‘엄마는 누가 돌봐주죠?’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브런치에서 내가 구독하던 작가를 포함해서 3명의 저자가 각자의 경험에서 우러난 임신과 출산과 육아에 관한 진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순간이 문자로 정리되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참고, 참고 또 참아야만 했던 그 순간들 말이다. 등 센서가 예민한 큰아이 때문에 5년 동안 침대에 누워 자 본 적 없었고, 모유를 먹이고자 꼭지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고통을 참아야 했으며, 아이 둘을 돌보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에 어린이집에 큰아이를 보내 놓고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울었는지. 저자들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 시절을 무식하게 통과한 나를 위로했다. 전우애는 부부끼리만 생기는 게 아니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혼잣말을 그렇게 많이 했다.
‘다시 임신 시기로 돌아간다면 태교 일기 대신 부부일기를 쓰고 싶다’라는 문장에는 ‘옳지 않아, 인생 어찌 될지 몰라.’ (질투임)
‘둘째 아이가 벌써 9개월인데 아직도 늘어난 뱃살을 보유 중’이라는 문장에는 ‘내 주변에는 25년째 보유 중인 친구들도 많아.’ (팩트임)
또 ‘가슴을 쥐어뜯는 젖앓이에 젖이 나인지 내가 젖인지’라는 말에는 ‘맞아 맞아. 진짜 사람 죽어.’ (격한 감정이입)
또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고 또 미워한다.’라는 말에는 코끝이 시큰해져서 ‘그렇지, 그게 진짜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웃다가 울다가 분하다가 또 아직도 여전히 사회가 분담해주지 못하고 일하는 엄마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육아의 무게에 속이 상했다.
또 알아두면 유용한 깨알 정보가 가득하다. 산후조리원, 유모차, 유아용품 고르기, 반반 육아까지, 출산을 앞두고 있거나 임신을 계획 중인 부부에게 꼭 권하고 싶다. 이미 지났지만, 남편에게도 선물해서 육아 중일 때 겪었던 남편과 나의 갈등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그 인간님(남편님)에게 알려주고 싶다.
지난주, 아파트 승강기 문이 열리자 아랫집 쌍둥이 엄마가 초췌한 몰골로 쌍둥이 유모차를 잡고 서 있었다. 나는 유모차를 재빨리 밖으로 당기며 “아이고, 아이들 돌보기 너무 힘들죠?” 했다. 쌍둥이 엄마는 울 듯한 얼굴로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쌍둥이 엄마가 내리고 나와 20살이 넘은 큰아들이 함께 승강기를 탔다. 나는 아들에게 얼마나 힘들까를 중얼거렸고 아들은 주옥과 같은 말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