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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Sep 19. 2020

이 부부의 세계도 놀랍구나, 빅 픽쳐 작가의 큰 그림.

부부의 세계가 노인 복지관에 미친 영향 2탄.

부부의 세계가 노인복지관에 미친 영향 1탄에 이어지는 글 입니다.


 내 마음이 와락 움직인 그 책은 더글라스 케네디가 쓴 소설 <오후의 이자벨>이다. 2010년, 더글라스 케네디는 소설 <빅 픽처>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국내 서점 200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 빅 픽처>는 프랑스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책과 영화를 다 본 입장에서 묘사가 섬세한 책이 훨씬 더 좋았다. 또한 미국 작가임에도 프랑스에서 문화 공로 훈장을 받은 세계적인 작가로 부지런하게도 매해 다양한 신작을 내놓는다.
  
< 오후의 이자벨>을 다 읽고 나니 놀라운 사실은 복지관 어르신들이 짜 놓은 플롯, 즉 한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네 명의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삶과 사랑의 의미를 알아간다는 그 대하드라마랑 일치한다는 사실이었다. 동양 어르신들의 삶과 서양 작가의 통찰이 만난 작품이랄까. 내용을 살펴보면.

내 마음이 와락 움직인 소설
                                                                    

     ▲  오후의 이자벨 ⓒ 밝은 세상


1977년, 21살의 샘은 파리에 도착했다. 미국 중서부 출신의 그는 주립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 장학금을 따놓은 상태로 무작정 파리로 날아왔다. 외로움이 장착된 청춘에게 낯선 도시, 무한 자유가 주는 싱싱한 고독과 찬란한 정처 없음은 파리의 겨울을 더 파리하게 만들었다.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거부할 수 없이 빠져드는 사랑은 로맨틱 영화의 단골 소재이자 낭만의 키워드다. 하지만 어떤 사랑은 '시련마저 달콤함으로 느껴지는 경지'가 아니고서는 한숨이 일상인 부침이고, 밤마다 뜬눈으로 지새워야 하는 뒤척임이다.


그럼에도 인생에 사랑이 빠지면 그야말로 김 빠진 맥주가 되는 것은, 사랑은 때때로 나를 넘어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통제할 수 없고 예측 불가능한 위험 달콤한 세계. 또 그런 감정의 널뛰기가 없다면 평화롭긴 할 터이지만, 지속되는 마음의 평화는 지루함을 가져오기도 하니까.



샘은 작은 서점에서 열린 출판 기념회에서 이자벨을 만난다. 그리고 첫눈에 반한다. 이틀 후 홀리듯 찾아간 그녀의 작업실에서 둘은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이사벨은 번역 일을 하는 유부녀. 그녀는 자신의 가정을 깰 마음은 없었기에 그에게 규칙을 제시한다. 그 규칙이란, 일주일에 두 번, 오후 다섯 시, 그녀의 작업실에서 만나는 것. 거부할 수 있는 끌림이었다면 이 소설이 쓰이지도 않았을 터.


여기까지 묘한 기시감이 드는 건, 일본 영화 <평일 오후 세 시의 연인> 즉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그 작품과 설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와 결말은 완전히 다르다.


영화 <평일 오후 세 시의 연인>이 신파로 끌고 가서 끝내 권선징악(?)적 결말로 시청자들에게 욕먹지 않을 안전한 선택을 했다면 <오후의 이자벨>은 얽혀 있는 여러 사람의 관계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인간이라는 우주를 더 심도 있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불륜을 조장하거나 미화한다고? 천만의 말씀. 유부녀를 사랑함으로 샘이 겪게 되는 마음의 고통은 어느 유행가에 나오는 '차라리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고통, 이 괴로움 나에겐 없을 걸'이란 가사가 구구절절 와 닿는 시간이 될 테니 그런 우려는 접으셔도 된다.


샘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에게는 공감의 시간이 될 테고, 샘과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에겐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즉, 어느 쪽이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책'임은 틀림없다.


이자벨의 남편 샤를은 명문가 출신의 성공한 사업가로 그 또한 내연녀가 있지만, 그 또한 가정을 깰 마음은 없다. 이 두 부부는 가슴 뛰는 사랑도, 안락한 가정도 포기하기 싫었기에 서로에게 반은 눈 감은 채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유지한다. 그렇다고 서로 껍데기만 껴안고 살 것 같지만, 결혼생활은 겹이 많아서 그 속에 여러 형태의 알맹이가 있으니 이거 아니면 저거라고 단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책에도 언급된 알렉상드르 뒤마의 말 '결혼이라는 사슬은 대단히 무거워서 들어 올리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처럼 우리는 타인의 도움으로 위기의 사슬을 들어 올리고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갖기도 하니까.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인생


친구 O는 남편이 여자 문제와 돈 문제로 가정이 해체 위기에 직면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기에 자신의 이런 상황을 드러내는 게 (자기 잘못도 아닌데) 부끄러워 차마 털어놓지 못하고 안으로만 병이 깊어졌다. 힘든 생각을 하던 그때, O를 지지해주는 누군가를 만났다.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을 세상에서 가장 경멸했기에 그의 마음을 받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그의 보살핌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 O는 꽤 힘든 시련을 겪었을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그게 벌써 15년 전 일이다.


지금의 O는 대오각성하고 돌아온 남편과 잘살고 있다. 그런 일을 겪고도 다시 남편과 산다면 껍데기만 붙잡고 살 거라고 속단하기 쉽지만, O는 단연코 아니라고 했다. 그때 O를 지지해주던 누군가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이, 남편을 보는 눈이 더 넓어졌다고 했다.


이러니 인생은 내가 겪어보지 않으면 함부로 말할 수 없을뿐더러 적어도 인생이라는 연산에서 1+1이 반드시 2는 아니다. 여담이지만 나는 말을 들으며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의 폭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의 살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일지도 모르는 그의 행동에 대해, 앞뒤 맥락 잘라내고 은근히 비난하는 뉘앙스가 깔린 그 표현에 대해 말이다. 마치 내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샘은 이자벨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했기에, 사랑하면서도 늘 사랑에 목이 마르다. 바다 한가운데 단 한 모금의 물을 얻지 못해 느끼는 지독한 목마름 같다. 사랑은 서로를 완벽히 가질 수 없을 때 깨지기도 하지만, 더더욱 질겨지기도 한다. 사랑과 이별, 그 경계선에 위태롭게 서 있는 둘은 몇십 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다음 내용이 궁금하면 소설을 읽으시라)


이 소설에 스쳐 지나가듯 쓰인 문장 중에는 삶을 관통하는 문장이 많았는데 이것들에 관해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어차피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데, 이럴 때 이런 생각에 한번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이제 이 글의 목적을 아셨으니 관심 밖의 독자들은 다른 글을 탐독하시거나 핸드폰을 끄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안주 삼아 가을바람 한 잔씩 하시길 바라겠어요. (훌쩍) 앗! 갑자기 말투가 왜 이러지? 진짜 빠져나갈까 봐 떨리는 거야? 여튼 내 마음에 걸린 <오후의 이자벨> 속 첫 번째 문장은 이거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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