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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Dec 23. 2016

“시인의 밥상”

공지영 에세이


 Intro     


버들치 박남준 시인이 만든 음식을 지인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느끼는 소소한 감상을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기록한 책, <시인의 밥상>.      

1부 엄마의 따뜻한 손길 같은 것
2부 지상의 슬픈 언어를 잊는 시간
3부 벚꽃 흐드러진 계절에 삼킨 봄
4부 시린 가슴 데우는 별 같은 ‘사람 밥상’

책 속에선 콩나물국밥, 가지선, 호박찜, 굴전, 굴밥, 애호박고지나물밥, 그리고 갈치조림 등 지리산에서 나는 각종 나물, 직접 농사지은 채소와 지인이 공수해온 해산물을 이용해 만든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두 그릇 뚝딱 굴밥

이 책은 필히, 식사 후에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책을 읽다 말고, 밥을 푸러 부엌으로 뛰어갈지도 모르니까.




밥상.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문득 든 생각.

“난 언제 밥상을 받아봤더라.”

까마득한 기분.

나 자신을 위해 따뜻한, 정성이 들어간 밥상을 마련해 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게 밥은 그저 ‘꼬르륵’ 소리가 안 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에너지공급원’이었으며, 내키지 않으면 건너뛰어도 무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 속, 지리산에 살면서 안빈낙도하는 버들치 시인의 삶에서 ‘밥상’은 자연과의 소통과 공감, 사람들과의 사랑과 나눔, 웃음과 행복의 통로였다.   

  

소박하고 따스했으며, 유머러스하고 감동적이었다.     


시인과 그의 지인들과의 진한 우정과 깊은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의 주파수가 ‘stable’에 고정.     


시린 겨울 탓에 마음이 허하거나, 지난 상처가 아물지 않았거나, 퍽퍽한 삶 속 지친 이들에게 고슬고슬하게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정성들여 끓인 국, 제철 나물과 채소를 조물조물 양념하여 내어놓는 소박한 밥상이 '최고의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 내리는 '풍경'


    책 속으로   
  

책장을 넘기자 보리와 갈대 사진이 보인다.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 책이 지향하는 바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보리 & 갈대

페이지 곳곳에 포스트잇을 다닥다닥 붙이며 단숨에 읽어내려간 책.

그 중 몇 구절만 이 곳에 남겨보려 한다.          




<1부 엄마의 따뜻한 손길 같은 것>

- 식물성 밥상이 가르쳐주는 인생의 원리     

(품위있는 호박찜과 호박국)

시인은 말한다. “거름이 너무 많아도 농사가 안돼. 쉽게 말하면 먹을 게 많은데 왜 애쓰며 꽃피우고 열매를 맺겠느냐고. 순지르기라는 걸 해서 첫 번에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걸 확 보여줘야 하는 거야. 그러면 ‘아,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구나. 우리 세대는 힘들 것 같으니 다음 세대에 기대를 해보자’하고 호박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지. 사람하고 똑같아.”     


공지영 작가 曰, “고통, 역경.. 이런 것들이 우리 생에 필요하다고, 심지어 아주 중요하다고, 반드시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숙한다고 나는 누누이 썼고 말해왔다. 그런데 심지어 성장의 거름이 고통이라는 진리가 사람이 아니라 식물, 호박에 이르는 우주적 원리였단 말인가. 호박에게도 고통은 정녕 필요했다는 말인가.”     


- 허접한 것들 가득한 세상에서 건져 올린 푸르른 숭어

(전주 새벽강의 ‘소합탕’)

이 나이에 이르러 이제 나는 안다. 삶은 실은 많은 허접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내 남은 생에 소망이 있다면 그 중 무엇이 허접하지 않은지 식별할 눈을 얻는 것인데, 여기 새벽강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그 중 몇 개를 건져 올리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살아 푸르른 숭어 같았다. 

흐르는 강물처럼

          

<2부 지상의 슬픈 언어를 잊는 시간>     

- 진정한 욕망과 충족은 어디서 오는가

(소박한 신비로움 애호박고지나물밥)

“나는 다르게 욕망할 뿐이다.” 그렇다. 그들은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흘려보내기를, 저 산과 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욕망한다. 그들은 누구보다 여행을 많이 떠나고 누구보다 계절을 깊이 즐긴다.   

    

나는 지리산에 갈 때마다 삶이 단순할수록 얼마나 풍요로운가를 절감한다. 그리고 똑같은 양으로 내가 얼마나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인가도 말이다.

         

-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사랑이 필요할까

(담백하고 짭조름한 유곽)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하고 톨스토이는 썼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사랑이 필요할까. 아마도 아주 작은, 아주 작고 따스한 안부 하나 만큼의 사랑이 필요한 건 아닐까.    

그냥 하품하는 걸까, 좋아죽겠다는 걸까

- 달의 뒷면은 몰라도 내 뒷면은 아는 친구들

(심원마을 백여사의 산나물밥상)

나는 안다. 이곳에서 이 좋은 친구들은 내 뒷면을 안다는 것을. 보지는 못했겠지만 어여삐 여겨준다는 것을.

이것을 우정이라고 나는 그날 달을 보며 문득 생각했고, 찬 대기 속에서 그들과 소주잔을 부딪쳤다. 쉰이 넘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날마다 더 절감하는 나는 생각했다. 충분하다, 참으로 충분하다고.      

    

<3부 벚꽃 흐드러진 계절에 삼킨 봄>

- 벚꽃 흐드러진 계곡에서 봄을 삼키다

(곱디고운 진달래화전)

시인이 잠시 술잔을 들고 말했다. “차비가 없어도 못 오고, 시간이 없어도 못 오지.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못 오고, 버리지 못할 게 있어서 못 오지. 우린 그걸 다 넘어서서 여기 온 사람들이야.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즐겨도 돼.”     


아름다운 활동사진 같은 봄날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뭐 큰 거 바라나? 이런 봄날 하루 휴가내서 이런 곳에 앉아 한가로이 냇물을 바라보는 게 그리 어렵던가?

곱디고운 진달래 화전

<4부 시린 가슴 데우는 별 같은 ‘사람 밥상’ >    

- 흔들리며 가는 배, 울면서도 가는 삶

(마음을 위로하는 거문도 항각구국)

“사람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 내가 죽을 때 바다를 닮은 얼굴이 되어 있다면 좋겠으나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빈 술병이라도 닮기를 희망한다.” (한창훈 작가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그를 보며 이미 바다를 닮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 순간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바다가 아니라 사람들을, 술병이 아니라 그걸 나누는 친구들을 닮아가고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흔들리며 나아가는 것,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배는 전복되거나 떠밀린다. 떠밀림의 끝은 좌초이다. 배가 그냥 있으면 훨씬 심하게 파도를 탄다. 그러니 가야 한다, 울어도 가야 한다. 바다가 늘 그러하듯이 세상이 우리를 내보낸 이유는 이렇게 흔들리라는 것이다.”(한창훈 작가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그래, 그렇겠다. 배가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러나 배는 그러라고 만들어진 게 아닐 테니까.

    

- 웃음의 진실, 맛의 진심

(바다가 와락 해초비빔밥) 고난에 빠진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용기, 평정심, 인내란 것 말고도 나는 유머를 말하고 싶다. 고난 속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쩌면 아무것도 잃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유머를 구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유머는 우선 교양, 그러니까 다양한 콘텐츠를 가져야 가능하고 그것을 구사하는 마음의 여유,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알아들을 귀 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머의 핵심은 남들이 은폐하는, 혹은 하려고 하는 진실의 과녁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데 있다.    

 

한 가지 덧붙여야겠다. 유머가 진실의 과녁을 맞혀야 하듯 눈물 또한 그러하며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맛 또한 어쩌면 그렇다고 말이다.     


- 단식, 지극한 혼자만의 시간

(김장김치 고명 올린 냉소면) 친구는 자신의 분노에 에너지를 더 공급하지 않기 위해 며칠 곡기를 끊은 것이었다. 재를 뒤집어쓰고 옷을 찢는 것은 사교활동을 차단하고 홀로 있음으로서 안으로 침잠하고 성찰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제 슬픔에 잠기거나 언짢아하는 친구가 있거든 “술 한 잔하고 풀자” 하지 말고, “너 혼자 머물며 단식하고 나와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단식은 내가 말한 옷을 찢고 재를 쓰고 한 성경의 단식과 닿아 있는 것인가 보다. 무엇을 쓴다는 사람들, 새로운 걸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이것이 필요하다. 나조차도 애타게 그렇다. 비워내는 것 말이다.     


- 그건 사랑이었지

(가죽나무판이 만든 오방색다식) 늘 말하지만 글쓰기는, 창작은 결코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필시 ‘뮤즈’를 필요로 한다. 백일 밤낮을 앉아 글을 쓴다고 위대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니란 거다.


대개 걸작들은 문득, 홀연히, 어느 날 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얻은 영감으로 시작된 것들이다. 나 역시 ‘뮤즈’가 오지 않으면 속수무책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그 ‘뮤즈’는 백일 밤낮을 앉아 뮤즈가 와주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에게만 온다는 것이다.   

오방색다식

다식을 먹으며 버들치 시인이 따라주는 해차를 마시고 있자니, 그 은은한 맛이 냇가의 한 줄기 소슬바람 같기도 하고, 첫 데이트 때 코끝을 슬쩍 스치던, 먼 기억 속 그의 스킨로션 냄새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맛은 노골적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고는 있어 섬세한 이들에게만 선물처럼 주어지는 감각이라고나 할까.


나는 왜 버들치 시인이 이토록 우리 것을 좋아하고 추구하는지 약간 알 것 같았다. 그의 성정이 그러하고 그가 추구하는 바가 그러하기에 그와 아주 잘 어울렸다. 은은하고 슬쩍 감추어져 있는데 찾는 자에게만 살포시 드러내는 것.     


- 씨앗을 품은 나이 듦의 아름다움 

우리들은 말없이 남은 막걸리를 한 잔씩 마셨다. 여름 해가 길게 지고 있었다. 늙어가는 것이 아름답다는 건 어떤 것일까. 씨앗이 바위를 뚫은 게 아니라 늙은 것이 어린 것을 위해 필사의 힘으로 생명을 키워낸 것. 그것이 늙음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문암송 곁에는 바람이 차게 식었다가 불어왔다.   

아름다운 관계_바위와 소나무


Outro


한 권의 책 속에서 삶에 대한 또 다른 접근법을 배울 수 있었다.

자연과 더불어 삶을 살아가는 방식, 사람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방법, 주변과 나의 행복을 찾아가는 법, 마주한 고통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방식, 비우고 내려놓으면서 삶을 관조하는 방법까지.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지향점이라는 건, 돌고 돌아 둘러 가더라도 결국은 도달하게 될 종착역으로 가는 길에 필요한 나침반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비록 지금은 내가 추구하는 방향에서 많이 벗어나 있더라도 결과적으론 내 안에 더듬이가 짚어내는 곳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온몸의 촉각을 세워 세밀하게 탐구하고 탐색하여 제대로 각도를 맞춰 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깊은 가을 내 나이.. 나쁘지 않다.

혹시 오늘도 혼자 밥을 먹는, 모든 쓸쓸하고 서러운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 작가의 말에서


모두에게 따뜻한 겨울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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