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후쿠오카 여행
Prologue
지난 가을,
오사카 출장에서 돌아온 후 일주일 만에 다시 떠난 유후인 힐링여행.
료칸이 있는 게스트하우스(이하 '게하')에 머무르며, 물안개 피어오르던 아담한 긴린코의 정경을 만끽한 시간.
가을이 무르익어 가던 그곳에, 일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녹여내고 돌아오다.
* 긴린코(金鱗湖): 석양에 물고기 비늘이 금색으로 빛나는 모습을 보고 '금비늘의 호수'라 이름 붙임. 호수 아래 온천이 솟기 때문에 늦가을부터 겨울철 호수면에 안개가 피어오름
청명하고 드높은 가을 하늘, 적당히 따사로운 햇살 아래 낯선 후쿠오카의 공기를 처음 접한 날.
후쿠오카 공항에서 유후인까지는 버스를 타고 약 2시간 거리. 고속도로 인근 자연식생의 변화를 관찰하며 그저 여유롭고, 마냥 즐거웠던 후쿠오카 여행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유후인 긴린코(金鱗湖)
우리나라 인사동 느낌의 유후인에 도착한 후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들을 둘러보던 눈호강도 잠시.
그곳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유후인 버거, 금상 크로켓, 벌꿀 아이스크림, 비스비크 롤케이크 등을 맛보았을 때 비로소 유후인에 왔음을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국내여행과 달리, 해외여행에서 맛 기행은 옵션이 아닌 필수라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기호 탓에, 자그맣고 예쁜 소품보다는 먹거리에 먼저 마음이 혹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빼곡히 들어선 소품 가게 거리를 벗어나, 해 지기 전엔 긴린코에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하여 다다른 그곳.
일몰 즈음의 긴린코.
아담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호수였다.
가을이 온지도 모른 채 바쁘게 일만 하다, 이 곳에 도착해서야 겨우 늦가을 정취란 걸 맛 본 그 순간.
바람에 날리는 단풍잎 하나에도, 금빛 잉어의 펄떡임에도, 쌍을 이뤄 걸어 다니던 오리들의 뒤뚱거림에도 소소한 행복이 가득가득 묻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긴린코에서 걸어나와 구글 지도의 도움을 받아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료칸이 있는 게하임에도 가격과 서비스, 거기다 콸러티 있는 아침 조식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던, 가성비와 만족도가 최고였던 곳.
덕분에, 내 방 창문 너머로 바라본 유후인의 밤하늘과 안개 자욱한 새벽녘 풍경, 나를 둘러싼 그 날 그곳의 공기는 잊히지 않을 만추(晩秋)의 기억 한 조각으로 남아 있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숙소에 짐을 푼 후 산책하러 나선 길.
초저녁이었음에도 인적이 드물고 가로등이 많지 않아 '야심한 밤, 한적한 시골길'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긴린코 근처로 다가서자, 서서히 보이는 물안개.
푸르스름한 가을 밤하늘 아래 반짝이던 수많은 별빛과 은은한 달빛, 폐부 깊숙이 파고들던 맑은 공기, 그리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안개가 이루어내는 이국적인 조화가 신선하면서도 꽤 낯설게 다가왔다.
시간이 갈수록, 기온이 낮아질수록, 안개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모양새가 그대로 눈앞에 보여 신비로움이 극에 달한 순간, 잠시 발을 내디뎌 안개 낀 물 위를 걷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호수에서 지류로 뻗어나간 모든 물길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
내 눈과 마음에 담아 두고, 오래도록 보고픈 풍경이었다.
새벽안개
이른 새벽.
호수 주변 마을이 안개에 폭 잠겼다.
게하에서 긴린코로 가는 길.
뽀얀 안개에 싸여있어, 새벽 찬 공기와는 대조적으로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았다.
호수 주변에 다가서자 안개로 완전히 뒤덮여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시야가 흐려졌고, 그래서인지 신선이 된 기분에 구름 위를 걷는 듯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면 구름처럼 상하좌우로 휩쓸리고 몰려가던 자욱한 안개.
아름답기도, 신기하고 신비롭기도 해서 손을 뻗어 잡아볼까 싶기도 했고, 안개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호수에 카누를 띄워 안갯속으로 들어가 보면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해가 뜬 시간,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안개가 걷히길 기다려보았다.
해가 중천으로 올라갈 때까지 안개는 더욱 짙어질 뿐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안개처럼 나 또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그때.
앞이 보이지 않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선뜻 한발 디딜 엄두가 나지 않았던 그 짧은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손 내밀면 닿을 곳에 '내 편, ' '내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갯속에 길을 잃고
어디로 가던 중이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던 때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뿐
안개가 서서히 걷히길,
'그대'라 불리는 사람이 내게 오길
Epilogue
숨 쉴 틈.
후쿠오카 여행은 물속에 온 몸이 잠긴 채 빨대 하나 입에 물고 숨을 쉬던 형국이었던 내게, 숨통을 틔워주는 고마운 여정이었다.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니기도 했던 그 많은 순간들 속에서 내가 왜 살아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고나 할까.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진 않지만, 분명 그곳엔 실재하는 실체(實體)가 있듯, 지금 나를 둘러싼 상황 탓에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는 듯하여도 내가 가야 하는 길은, 또 살아내야 하는 시간은 실재하고 있음을.
앞이 안보이던 안갯속에서도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 '그대'를 기다리듯, 지금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숨 돌릴 때임을.
시간이 지나 안개가 걷히면, 눈 앞에 있는 그 길을 따라 내게 와 준 '그대'와 함께 걸어가면 될 테니.
힘들면 쉬었다 가고 지치면 함께 손잡고 가는 여행길처럼, 우리네 인생길도 마찬가지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