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대만 작가 룽잉타이
Intro
책모임을 함께 하는 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된 '사랑하는 안드레아.'
대만의 사회문화비평가인 ‘룽잉타이.’
그녀와 독일인 남편 사이에 태어나 독일에서 자란 아들 ‘안드레아’가 18살되던 해부터 3년 동안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잡지에 연재한 후 출간한 책.
때론 대놓고 직설적으로, 때론 따뜻한 말로, 때론 자유분방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나누는 엄마와 아들 사이 대화와 소통의 기록.
이 세상 대부분의 엄마가 바랄 것 같은, 친밀하고 애정어린 아이와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서로 알아간다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안고 업고 뽀뽀하고, 말 그대로 ‘물고 빠는’ 엄마와 아이 관계.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내 품속 자식이 아닌, 낯선 존재인 ‘아이 사람’이 눈앞에 있다.
작가의 말처럼, “나에게 안기고 입 맞추고, 내 손을 잡아끌고 눈을 떼지 못하게 하고, 머리에서 땀냄새를 풍기던 그 남자아이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싶은 그런 때.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고, 엄마는 그 아이의 세계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엄마와 아이의 세계가 분리되는 것에 대해 극도의 분리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 ‘엄마’라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무너지면서.
작가의 말처럼, “부모와 자식이 한집에 살면서도 나눌 대화가 없고, 서로 절절히 사랑하지만 오히려 서로를 잘 모르고, 다가가기를 열망하지만 그 접점을 찾지 못하고, 표현하기를 원하지만 언어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작가 또한, 물리적 거리로 인해 정서적인 그리고 마음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것을 우려하여 “남자아이 '안안'(아들의 어릴 적 아명)을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성장한 안드레아를 알아갈 수는 있다. 나는 열여덟 살의 이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안드레아에게 ‘편지 형식의 칼럼’을 써보자고 제안을 하고, 예상과 달리 아들이 선뜻 제안을 수락하면서 3년간의 장거리 편지소통이 시작된다.
놀라웠던 건, 편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과정이었다.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안드레아가 영어로 편지를 쓰면, 작가가 이 편지를 중국어로 번역을 했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국제전화, 이메일, 메신저를 통해 단어의 정확한 뜻, 단락 구성, 명확한 의미 전달, 논리구조 등을 토론하면서 서로의 가치관과 생활태도,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
진실로 ‘불가사의’ 한 일을 해낸 두 사람.
책을 읽는 내내, 소통의 본질이 어떤 모습인지 그들이 내 눈앞에서 생생하게 시연하고 있는 듯했다.
가장 사적이고, 가장 친밀하고, 가장 진실한 손의 흔적
“시간이 얼마쯤 흐르고 나서야 문득 이 일이 더욱더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차렸어요. 바로 제가 엄마와 연결돼 있다는 거. 뿐만 아니라 자신이 엄마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아갈 ‘소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갖지 못하는 거라는 것. 한데 그걸 제가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그 느낌.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갈 그 소명.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생명의 씨앗을 품었을 때부터 '탯줄'로 연결된 엄마와 아이.
그 탯줄을 자르며 아이가 세상에 나왔어도, 엄마는 보이지 않는 탯줄로 아이와 연결되어 있음을 마음으로, 가슴으로 항상 느끼고 있다.
멀리 있어도, 늘 곁에 두고 볼 수는 없어도,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숨 쉬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지하며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것.
이것이 엄마로서 아이에게 끝까지 남겨주고픈 ‘사랑’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룽잉타이와 안드레아는 어린 시절 이야기, 자아정체성, 가치관, 세계관부터 역사, 세계사, 정치, 외교, 사회, 문화(음주문화 포함), 性, 사랑, 음악·미술 등 예술을 아우르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가운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모습에서 시샘에 가까운 부러움이 마음 한 구석에서 솟구쳐 올랐다.
지금의 내 딸아이가 조금 더 컸을 때, 이렇게 다양한 주제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발전방향과 대안을 제시하면서 생각의 파이가 커지고 사고의 깊이가 무르익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소망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느낌도 함께.
기억에 남는 대화
편지 내용 중엔 공감할 수도,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글이 있었다.
“엄마는 내 아이에게 ‘권력과 무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한편, 부당하게 해를 입지 않도록 자신을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것일까?”
“넌 앞으로 네가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야. 그 사람들과 반드시 같이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을 테고, 그 사람이 너의 상사, 동료, 부하가 될 수도 있고 시장이나 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어. 너는 그때마다 결정해야 해. 그와 결별해서 저항할 것인지 아니면 타협해서 받아들일 것인지 말이야. 저항한다고 하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타협한다고 하면, 안심할 수 있을까?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찾는 건 정말이지 어렵고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너 스스로 찾아내야 해.”
아이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몇 번이고 되새길만한 조언이었다.
나는 저항했는가, 타협했는가.
만약 아이가 내게 묻는다면, ‘저항하다 짓밟힌 후 묵묵히 버티며 힘을 길러 다시 저항하기를 반복했다. 저항은 타이밍과 지속성이 중요하며, 전략과 전술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항의 대가는 때론 눈물이기도, 때론 상처이기도, 때론 해방감이기도 했으나, 그 과정에서 산산이 부서져 흙이 되어버린 내 마음과 별개로, 내가 한 선택은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당당하길 바랐던 것에서 시작했다고 답할 것 같다.
또 한 가지, 부모의 정의.
“부모란 말이야, 건넛산 돌 쳐다보듯 하는, 익숙해져 버린 낡은 집 같아. 끊임없이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쁘면서도 슬프고, 달려가 안고 싶으면서도 불러 세우지 못하는 그런 존재란다.”
“엄마는 네게 ‘집’을 주려고 무던히 애를 썼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마을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그곳에서 자라길 바랐지.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너만의 마을을 가지게 되길 바라면서 말이야. 앞으로 아득히 먼 길을 유랑할 너에게 언제나 변함없이 너를 기다려주고 받아주는 마을이 있기를.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언제라도 너를 꼭 안아주는 오랜 친구같은 마을이 있기를 원했어.”
내 아이에게 난, 울타리가 되고 싶었다.
충분히 힘을 가질 때까지 외부의 각종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고, 가끔 그 위에 걸터앉아 더 넓은 세계를 관망할 수도 있으며, 때가 되면 훌쩍 넘어가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올 때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그런 울타리.
이왕이면, 웬만해선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반짝반짝 빛나며 그 안에선 지상 최고의 안락함과 아늑함,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울타리가 된다면 바랄 게 없겠다.
마지막으로, 학업과 경쟁, 입시라는 제도 틀 내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아이에게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말.
“인생의 트랙 위에서 충분히 빨리 달리지 않으면 뒤떨어지고 만다.”
“엄마는 네가 열심히 공부하길 원해. 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성공하길 원해서가 아니라, 네가 선택권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라서야. 생계에 쫓겨 마지못해 하는 일이 아니라 의미 있고 여유 있는 일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말이야.”
“우리가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할 대상은, 멀고도 험한 이 길의 마지막 종착지는 역시 ‘자기 자신’이야. 네 앞 세대와 비교할 이유도 없고, 앞 세대의 바람에 너를 맞출 필요도 없어.”
아마도, 대부분의 엄마들이 공감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다.
만약 내 아이가 엄마가 생각하는 '일의 방향성'이란 게 있냐고 묻는다면, 그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가치, 지켜내야 할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가 아들에게 말했듯,
조금 시간이 흐른 뒤, 나 또한 훌쩍 커버린 내 보물과 대화란 걸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상상하며 하고픈 말.
“엄마는 널 판단하지 않아. 엄마는 네게 ‘묻고’ 널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야. 그러니 엄마를 좀 봐주렴. 엄마에게 용기를 좀 북돋아 줘.”
Outro
서로를 알아가고 대화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그 시간, 그 상황, 그 생각, 그때의 우리 모습을 서로에게 새기고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스럽고 귀엽고 예쁜 모습, 세상으로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기특한 모습을 내 기억에 새겨놓듯, 내 아이에게도 따뜻하고 아늑하면서도 든든한 엄마의 모습을 흔적으로 남겨, 우리의 아름다운 시간에 대해 서로가 '증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그 바람의 기저에,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관계가 있을 테고.
이것 외에, 더 바랄 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