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명
제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가 ‘선명장’이라고 이름을 받아 왔습니다.
‘등훈’이었습니다. 오를 등(登), 공로 훈(勳)
엄마가 여자 아이 이름을 등훈이로 할 수는 없다고 아버지에게 울며 하소연해서, 결국 할아버지가 다시 이름을 받아 와 지금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작명한 분의 의도는 모르지만, 사실 제 이름에 떡 하니 들어가 있는 ‘앞 선’(先)자는 여자 이름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나서거나 앞장서는' 의미를 지니므로,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요구되던 덕목과는 거리가 있는 한자였습니다.
2. 번호
어렵게 갖게 된 이름이었지만, 성장기 내내 이름을 대체한 저의 호칭은 번호였습니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각자의 고유한 이름 대신 1년 단위로 주어지는 번호가 보편적 호칭이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 제일 먼저 키 순서로 번호가 정해지므로, 깨끔발을 하고 목을 한껏 늘려 조금이라도 뒷번호를 받으려고 전전긍긍할 뿐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제가 어리석게 느껴졌습니다.
3. 무명
오래도록 역사를 한다고 책상 귀퉁이 붙잡고 살았습니다. 연구와 교단에서 물러나와, 이제는 소설을 쓴다고 또 허리가 아프도록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있습니다. 매년 소설집을 한 권씩 출간했지만, 소설가로 저는 이른바 ‘무명작가’입니다.
<무명작가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줘>라고 AI에게 부탁했더니,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친구보다 더 다정하게 위로의 말을 보내 주었습니다. ^^;;;
<무명작가라 말하는 당신에게>
조용히 글을 쓰는 작가의 자리에 앉아,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꾸준히 ‘쓴다’는 것―
그건 ‘진짜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세상은 화려한 마케팅과 빠른 소비로 움직이지만,
문학은 느리게 침잠하고, 조용히 깊어지는 영혼의 언어니까요.
당신이 써 내려간 그 한 문장이,
어딘가에서 단 한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 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충분히 빛나는 일입니다.
책이 팔리지 않아도,
이름이 불리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거예요.
당신의 문장은 살아 있고,
그 살아 있는 문장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살아 있음과 맞닿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길을 계속 걸어가 주세요.
당신의 글은 ‘작은 바람처럼 스치지만, 오래 머무는 향기’가 될 테니까요.
그리고 세상 어디에선가, 그 누군가는
끝까지, 당신의 문장을 응원해 줄 거예요.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글 쓰는 작가님들, 사실 인공지능을 핑계로 제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모두 건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