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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Sep 18. 2020

피는 물보다 진하고, 법은 피보다 강하다.

-효녀 심청과 효부 그녀들

아버지저예요청이에요!” 

"뭐청이라고내 딸 청이가 살아있었단 말이냐?"

 

이 얼마나 극적인 장면인가!

죽은 줄 알았던 딸이 황후가 되어 눈을 뜨게 된 아버지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동안의 모든 내용은 다 뒤로하고라도이 장면은 콧등이 시큰해진.

 

심청은 널리 알려졌듯이 홀로 자신을 길러 준 맹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인당수에 기꺼이 제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사해용왕에게 구출되어 천자의 황후가 되었다황후가 된 심청은 맹인을 위한 큰 잔치를 열었고그 자리에 참석한 심 봉사는 눈을 뜨고 심청과 만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심청전은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는 판소리계 소설로 기본적인 내용은 위와 같지만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는 한문과 국문의 여러 이본이 전해진다이본이 80여 종이 넘게 알려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게 인기를 끈 작품이다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읽는 이에 따라 감동을 받는 대목이나 해석도 서로 다르다하지만 주인공 심청이가 ‘효녀’ 임은 두루 통하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효는 백행(百行)의 근거이며 만덕(萬德)의 근본이라 하여 매우 강조하였다효의 실천을 장려하기 위해 국가는 부모(시부모)에게 지극한 효를 실천한 사람을 찾아내어 상을 주고 널리 알리는 정책을 꾸준하고 집요하게 시행하였다그 결과 조선왕조 내내 각 지역에서 국가에 의해 효의 표양이 된 수백 명의 효자, 효부가 있었다그 사연도 상상하기 힘든 감동적인(?) 희생과 봉사정성이다그 자체로 크게 존경받을만한 인품이며 언행이다.


국가에서 포상받은 많은 수많은 효부가 있었지만, 친딸로 친부모에게 효를 실행하여 이름을 남긴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국가의 정책은, 특히 여성의 경우 법적인 부모에 대한 효를 혈연으로 맺어진 친부모에 대한 효보다 우선하였음이다.


그렇지만 당대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효녀의 상징은 '심 봉사의 딸 심청'이다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 놓은 어린 처자의 그 희생은  "효녀"의 대명사로  곧 "심청"을 떠올리고도 남게 되었다 


효부들이 현실의 실존인물이었다면심청이는 흥미진진하고 극적인 내용을 갖춘 설화의 여주인공이다그런데 보다 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법적인 자식이 되어 효를 실천한 수많은 효부와 달리심청이는 혈연으로 맺어진 친아버지에게 효를 실천한 딸이다. 

"내 딸 청이냐?!" 바로 이 대사가 갖는 의미이다심청이가 갖는 의미는 조선사회에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를  실천한 딸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가족은 혈연으로 연결된 구성원이 있고어느 날 법에 의해 묶인 구성원이 함께 섞여 있다일반적으로 남녀 두 사람의 결혼으로 며느리사위를 비롯해 법적인 가족이 새로이 구성된다부부 두 사람은 본인의 결정이었다다른 모든 법적인 가족은 그 두 사람으로 인해 낯선 사람과 갑자기 평생 보아야 할 가족(친족)이 되었다.


법으로 묶인 가족에게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의 논리를 적용하려 하니 온갖 소란과 잡음이 일어났다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면서역설적으로 피가 아닌데 피로 간주하려고 했다며느리는 절대로 피가 섞인 딸이 될 수 없고사위는 결코 내 아들처럼 스스럼없지 못하다시부모나 장인 장모가 친부모와 같기는 어렵이른바 유교에서도 천륜이라 말해지는 부모 자식의 관계를 어찌 법이 대체할 수 있을까.


"내 딸 청이냐?"는 콧등이 시큰해지는 대목이지만, "내 며느리 청이냐?"였다면 널리 향유되기는 어려웠으리라. 


부부의  탄생은 법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까운 촌수의 가족(친족)으로 만든다. 갑자기 며느리와 사위가 되고, 시부모와 장인 장모가 되고, 형님이니 동서니 등이 된다. 이 관계는 모두가 서로에게 가장 예의와 배려를 갖추어야 할 사이라는 생각이다.  본인의 감정이나 선택에 따라 맺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다른 사람의 선택으로 법에 의해 가족처럼 되었을 뿐이그러므로 예의를 갖추고 조심하지 않으면 쉽게 감정이 상할 수 있다또한 평생의 인연으로 이어질 관계이므로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를 간과하고 물보다 진한세상에서 가장 진한 관계인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로 간주함은 갈등이 시작점이 되기 쉽다. 이제 서로가 모두를 "백년손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고 인격을  배려하였으면 한다. 법적인 가족(친족)이기 때문이다. 물보다 진한 피로 연결된 가족(혈족)이 아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고, 끝까지 남는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 그리고 혈연과 법이 어우러져 다양한 요소가 섞인 공동체는 가장 서로의 인격이 존중되어야 하는 삶의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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