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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Oct 27. 2020

희롱과 ‘갑질’

-은밀한 행각이 드러날 때

그런 사람인지 몰랐어요.’

거꾸로 그런 분이신지 몰랐어요.’도 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행각이 드러났을 때, 주변 사람이 의외라며 놀라는 경우가 있다.

봉사활동, 기부를 비롯해 남몰래 선행을 베풀어 온 사실이 알려질 때도 그렇다.

선행이든 비행이든 정작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모르던 경우가 왕왕 있다.

 

사람에게는 친구, 동료, 이웃, 심지어 가족도 모르는 행실이 있을 수 있다. 주변 사람은 모르는 나 혼자만의 활동이 지탄받을 행각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사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죄는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문제되는 언행인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 성현(1439~1504)이 기록한 일화를 하나 보자.

 


최세원(崔勢遠)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 친구 중에 강진산노선성성하산은 모두 방탕하고 못난 사람이로되, 오직 서평(西平) 한경신이 오로지 절조는 사람이라 하여 나 또한 그를 당대의 성인(聖人)이라 말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도 성인이 아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울타리 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니, 서평이 문 앞 추녀 끝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어린 종이 세숫물을 올리니까, 서평이 세숫물을 움켜서 어린 여종 얼굴에 뿌리면서 희롱하는데 이것이 어찌 성인의 할 짓이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배를 안고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웃었다.(용재총화2)


최세원은 벗을 좋아하고 말주변이 좋으며, 늘 우스갯소리를 잘해 주변을 웃게 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의 일화 끝에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는 말이 붙고는 하였다. 최세원의 말투나 억양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가 평소 주변을 웃겼다거나 저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포복절도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진지한 험담은 아니었다는 느낌이다.

 

시대는 조선시대였고, 한경신은 양반이고 관료였다. 그가 희롱한 상대는 집안의 어린 여자 종이었다. 세숫물로 장난을 걸며 여종을 놀린 행동이 당대에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채신없는 짓이었으며, 더더욱 평소 뛰어난 절개와 지조로 이름을 높인 그의 평판에 크게 어그러지는 행각이었다. ‘당대의 성인으로 불리던 그의 명예는 여지없이 실추되었고, 여럿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지위와 권력이 개재된 관계에서 자행된 갑질이라는 천박한 언행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 계약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상대에게 오만무례한 언행으로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자행할뿐더러, 자신의 잘못된 언행을 자각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조차 않는. 사회적 계약 관계일 뿐인데, 때로 조선시대 주인이 여종을 희롱한 것 이상의 모욕을 가한다. 

  

 아무도 개의치 않고 저지른 행각이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베푼 선행이건, 때로 예기치 않게 세상에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이름이 알려진 교수가 알고 보니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거나, 세상의 이목을 받은 사람의 추행이 드러나는 일이 있다.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래도록 남몰래 다른 이를 돕고 살아온 사람의 미담이 알려지기도 한다. 잘못된 언행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사과할 줄 몰라 더 공분을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손함으로 선행 이상의 감동을 주는 사람도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공자는 논어위정(爲政)나는 일흔 살이 되니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게 되었다’(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다. 그 경지는 칠십에 이르러 뚝 떨어진 열매가 아니라, 공자가 평생토록 수행해 온 인격의 열매였다. 다른 이의 이목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이 자신의 인격을 지키고 수양해 왔음이다. 공자는 누가 봐도 '그런 분'이었다.


조선 후기의 선비 서직수(1735~1811)는 자신의 초상화에 평생을 돌아보매 속되게 살지 않은 것만은 귀하다고 썼다. 허물과 부족함은 있기 마련이고,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는 삶이다. 하지만 평생을 돌아보며 내 초상화에 쓸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본다. 평소에 나를 알던 이도 '그런 사람'이었다고 공감할 말이어야 할 터이다..




<서직수 초상>

서직수가 62세 되던 해에 얼굴은 최고 궁중화원 이명기가, 몸체는 김홍도가 그린 합작이다.

그림 상단에 서직수가 스스로 평한 글은 다음과 같다.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을 그렸다.

두 사람은 이름난 화가들이지만 한 조각 내 마음은 그려내지 못하였다. 안타깝도다.

내가 산속에 묻혀 학문을 닦아야 했는데 명산을 돌아다니고 잡글을 짓느라 마음과 힘을 낭비했구나.

내 평생을 돌아보매 속되게 살지 않은 것만은 귀하다고 하겠다”


※ 그림과 설명은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이수미, 〈서직수 초상 이명기・ 김홍도〉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49

인용문의 출처는 한국고전번역원이 제공하는 한국고전종합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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