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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Oct 29. 2020

조부모와 손주

- 간장게장의 공통분모

손자는 밤마다 밤마다 글을 읽지 않는구나.”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아침마다 술을 몹시 마신다.”

 

할아버지 채수(1449~1515)가 슬쩍 손자를 나무라니, 손자 채무일(1496~1546)이 응수한 시이다.

무일은 이때 나이 대여섯 살 정도였다고 한다할아버지 채수는 손자 무일을 눈 오는 날이면 안고 거닐면서늦은 밤이면 무릎에 안고 이렇듯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채수는 재상직을 역임한 문신으로 음악과 시문에도 뛰어났다손자 채무일도 뒷날 과거에 급제하여 문신으로 이름을 남겼으며선비로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으로도 저명하였다

 

조선 전기에 이문건(1494~1567)이 손자 이수봉(1551~1594)이 태어난 해부터 1566년까지 양육하는 과정을 기록한 유명한 육아일기도 남아있다.(양아록할아버지 이문건은 손자를 사대부다운 인물로 기르기 위해 한문 독해를 비롯한 학문과 인성을 정성을 다해 교육하였다

 

조선시대 아동교육의 현장은 가정이었다. 10대 전반까지는 대개 집에서 조부나 부친숙부 등에게 글을 배웠다채수와 이문건은 손주를 학문과 인품을 고루 갖춘 훌륭한 사대부로 만들기 위한 교육자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도 남은 할아버지였다

 


오늘날은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조부모가 어린 손주를 돌보는 일이 급증하고 있다.(조부모가 손주의 육아를 담당하는 '황혼육아'문제는 여기에서는 논외로 한다어려운 문제이다조부모의 손주에 대한 책임은 무거워졌지만손주에 대한 교육에서는 소외되고 있다조부모 세대의 지식과 경험이 세상 속에서 외면당하는 현실이기 때문이

 

조선 후기에 섣달 그믐날 밤’, 즉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이를 기리며 몇 선비가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문신이며 유학자인 김창협(1651~1708)이 지는 해를 재촉하는 시간에 시끌벅적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시작하여 자조적인 한탄을 담은 시를 읊었다

 

백발 머리 감노라니 속절없이 서글퍼져

재각 안에 활짝 핀 매화꽃도 관심 없네 

이제는 세상만사 젊은이에 뒤처지니

가히 액 막는 술잔 잡는 일만 하는구나 

 

나이가 들어감은 백발이 늘어감이요내 세월이 지나감은 젊은이들이 앞서감이다.

학문이나 세상살이에 큰 변화가 없었을 것 같은 조선시대에도, 나이가 드니 세상만사에 뒤처지게 됨을 서글퍼했다하물며 현대사회에서는 어떠하랴조부모는 물론 부모세대 조차 학창 시절에 배운 지식은 낡아 버렸으며사회생활에서 쌓은 경험과 경륜도 그다지 유용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직업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이 사회에서 생존 자체를 위해 새로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가까운 80대 노인 한 분이 말씀하셨다어린 시절 동네에는 한글을 못 깨쳐 바보 취급당하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고 한다세상이 달라져서 이제 당신이 그런 바보가 되었다고 하셨다간단한 일상인 영화를 보고음식을 주문해 먹는 일도 기계로 대체되어 이제 안 가신다고 한다컴퓨터와 핸드폰 작동도 서투르거나 간단한 기능을 몰라 애를 먹는 경우도 많다고 하셨다노인의 현실이 이러한데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손주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우며 자랐다물론 사춘기 이후에 온몸으로 저항한 내용도 있다. 여자가~’로 시작하는 훈육이다하지만 알게 모르게 할머니의 일상의 가르침은 내 삶에 깊이 스며들었다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세상을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웠다역설적으로 할머니가 보여준 전통시대 여성의 삶에서 나는 무엇을 버려야 할지도 정리할 수 있었다

 

역사를 공부하고 이념과 종교의 혼란을 겪으며 나는 누구인지왜 나는 나인지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 앞에 방황할 때밥상머리에서 배운 할머니의 교육이 내 안에 뿌리로 있었음을 느꼈다할머니가 조선시대 이문건처럼 작정하고 나를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대학 3년이 될 때까지 함께 한 할머니의 일상말하자면 할머니 존재 자체가 교육이었다


아들을 기르면서이제는 장성한 아들을 대하면서 가끔씩 나의 언행에서 내 엄마를 본다더 가끔씩은 할머니도 본다아들이 유치원을 다닐 때어느 날 보니 간장게장을 손가락 사이를 지나 손목에까지 흘러내리는 간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먹고 있었다나는 한 번도(사실 지금까지도간장게장을 먹은 일이 없다어린 아들이 간장게장 애호가가 된 까닭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식성 때문이었다일하는 엄마였던 탓에아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성장하였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들이 몹시 사랑하는 영혼의 음식은 간장게장산 낙지순대족발선짓국........... 등이다. 아들에게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식성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어느덧 조부모의 삶 자체가 그 아이의 삶에도 차지하고 굳어지고 있음이 보인다

 

조선시대 유학자가 남긴 노인이 되면 세 가지가 거꾸로 간다는 말이 있다초저녁에는 잠이 쏟아지는데 밤에는 잠이 안 오고젊어서의 일은 환한데 어제 일은 가물가물하고자식과는 소원한데 손주는 몹시 사랑한다는 것이다조부모에게 손주는 자식을 기를 때 미처 몰랐던 행복이며손주에게 조부모는 부모와는 또 다른 의미의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다


2020/10/28.


※ 인물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노인이 되면 세 가지가 거꾸로 가는 '노인삼반'은 한양대 정민교수 기고문. 조선일보 (2014.03.26)

※ 인용한 시의 출처는 《농암집》 4, 시.  한국고전번역원 DB.

※ 글머리 사진은 캐나다 밴쿠버 English Bay에서 바라본 노을.

    Photo by The Narrative L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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